미국 최고법원은 연방대법원이다. 현재 연방대법원 수장은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다. 그는 2005년 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에 의해 50세 나이에 대법원장으로 임명됐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부시 가문과 인연이 깊다. 자신을 대법원장으로 임명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재임 2001~2009년)의 부친이 부통령으로 재직했던 레이건 정부 시절 법무부에서 근무를 시작해 부시(부친) 부통령이 1989년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에도 계속 법무부 요직을 맡았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50세의 존 로버츠를 연방대법원장으로 임명할 때는 보수적 철학과 세계관을 수호하는 역할을 잘해줄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버츠 연방대법원장은 현재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 정치도 진영 논리에 따른 정쟁이 계속되고 있다. 진영 대결에서 중심을 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는 요즘 한국 정치를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현재 미국 연방대법원은 로버츠 대법원장 외에 보수 성향 대법관 4명과 진보 성향 대법관 4명으로 구성돼 있다. 연방대법관들은 대체로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의 철학 및 세계관과 일치하는 판결을 도출하려 한다. 그래서 로버츠 대법원장의 중심 잡기는 공화당 진영 정치인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로버츠 대법원장이 ‘보수 성향’ 법관임은 맞다. 종교의 자유를 확장 해석하며 종교재단 설립 학교의 권한을 강화하고, 소비자 권리와 노동조합의 힘을 약화하는 판결을 이끌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최근 판결들을 보면, 낙태 시술을 할 수 있는 병원의 자격 요건을 엄격히 제한하는 루이지애나 주법(州法)을 무효로 하는 판결, 어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온 불법 이민자 자녀를 보호하기 위한 오바마 행정부의 불법체류 청소년 추방유예 제도(DACA)를 존속시키는 판결, 직장에서 고용 또는 해고 때 동성애자 등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판결 등에서 진보적 성향 법관들의 의견에 동참했다.
우리 정치권에서 나오는 “개가 주인을 문다”는 식의 폭언 수준은 아니더라도, 이러한 로버츠 대법원장의 중심 잡기에 대해 공화당 쪽에서 비아냥거림은 나온다. “자기가 솔로몬 왕이 된 거로 착각하고 있다” “대법원장 그만두고 대통령 선거 출마하라”는 등의 비난을 한다. 미국 주요 언론은 그의 이러한 중심 잡기를 통해 ‘법관들이 판결에 임할 때는 공화당원도 민주당원도 아니고’ ‘사법부는 삼권분립의 다른 축인 대통령과 의회를 사로잡은 당파주의(partisanship)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메시지를 미국 국민에게 보내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점진주의자이자 사법부 독립성을 중시하는 제도주의자라는 평가에 필자는 동의한다.
정치적 변화의 폭이 크고 속도가 빠른 시기에는 모든 국가기관이 정치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많은 고위 공직에 대한 임명권을 대통령이 갖게 되는 대통령제에서는 더욱 그렇다. 각 국가기관은 불가피한 변화에 발을 맞춰야 하지만 그 본연의 기능과 임무가 훼손되는 것은 위험하다. 그래서 대통령과 법무부장관 그리고 여당 정치인들이 자주 언급하는 ‘검찰의 민주적 통제’라는 표현에 대해 심각한 우려가 제기된다.
정말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중요하면 검찰총장과 지역검사장을 선거로 선출하면 된다. 그런데 선출된 검찰총장과 검사장의 임기 중에는 어떻게 민주적으로 통제할 것인가? 방법이 없다. 선출된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보장된 임기 중에 민주적으로 통제할 방법이 있는가? 국민소환이라는 제도가 있지만, 우리 헌법은 허용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초헌법적 혁명 외에는 없다. 하지만 헌정질서를 유지하면서 법치주의에 따라서 파면할 수는 있다.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의 권력 오남용은 법치주의로 통제해야 한다. 정치적 격변기에 법치주의에 의한 중심 잡기가 사라질까 봐 두렵다. 법치만능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의회에서 만든 법률은 무조건 옳다는 입법만능주의는 더더욱 아니다. 법치주의의 정당성은 민주주의에서 나오지만, 감성적 민주주의가 이성적 민주주의를 압도하는 듯한 시대에 민주주의의 궤도이탈을 막아주는 법치주의가 강고하지 못하면, 민주와 독재의 경계선은 허물어질 것이다.
동의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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