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이라는 용어는 나라를 위해 헌신한 공적에 보답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대한민국 국가보훈기본법은 선현들의 공적을 잊지 말고 길이 받드는 일이야말로 국가 발전을 위한 토대임을 선언한다.

언뜻 상식적 문구이지만 현실에 적용하려면 상당한 숙고가 필요하다. 실로 누구를 어떻게 보훈할지의 문제는 해당 과거사를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볼지, 어떠한 핵심가치를 평가의 기준으로 삼을지, 누구의 기억을 더 신뢰할지, 과연 누가 애국자고 반역자였으며, 누가 피해자고 가해자였는지 등을 판단해야 하는 까다로운 사안이다. 이런 점에서 보훈은 국가정책이기에 앞서 국민의 기억을 소통시키고 갈무리하는 일이다.

이미 우리 법률은 오래전부터 ‘국가유공자’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나라를 지킨 군인과 경찰만이 아니라 독립유공자와 민주유공자, 사회유공자도 보훈의 대상으로 포함시키고 있지만 주관부서인 국가보훈처는 관행적으로 군사원호청에 가까운 역할을 맡아왔다. 물론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군경을 제대로 보훈하는 것은 국가 존립의 바탕이다. 비겁자와 기회주의자가 더 많은 이득을 차지하는 사회는 결코 정의롭다 할 수 없다. 그렇지만 군인이 ‘애국’을 독차지한다는 것은 그다지 민주적이지 않다. 더구나 ‘성공한’ 군인들이 지나치게 많은 공을 차지한다면 그냥 두고 볼 일은 아니다.

멀리 독일의 사례는 이 땅의 보훈 문제를 되돌아보는 데 유용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분단된 독일에서 군인의 영웅적 희생을 기념하는 행위는 사회적으로 용납되기 힘들었다. 특히 서구적 민주주의 체제를 받아들인 서독에서 전쟁에 대한 기억은 주로 피해자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른바 ‘전쟁과 국가폭력의 희생자’에 대한 추모가 대세를 이뤄가면서 어느덧 독일인(서독인)들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와 스스로를 동일시하게 되었다.

전후에 성장한 새로운 세대의 독일인이 아우슈비츠에서 죽어간 유대인에게 연민을 느끼기는 쉬워도 천인공노할 가해자들이었던 앞 세대의 군인들에게 공감하기는 좀처럼 힘들었다. 국가를 위해 싸웠건, 국가에 의해 희생됐건 일괄하여 민족적 자기 연민 대상으로 탈바꿈시키는 관행이 자리 잡아갔다. 이는 마치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폭피해자들의 죽음을 종교적 차원으로까지 승화시키는 자기숭배적 기념 방식과 유사하다.

평범한 독일 병사들이 흉악한 나치스로부터 결백하며 오히려 큰 피해를 받았다는 어색한 변호론을 통해 1955년 서독의 연방군이 창설될 수 있었다. 물론 군인을 피해자로만 내세우는 것은 부적절하기에 새로운 방식의 영웅주의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7월 20일’의 신화였다. 패전의 기운이 짙던 1944년 7월 20일 독일 군부 핵심인사들이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해 피의 숙청을 낳은 희대의 사건이야말로 독일 정규군이 결백하다는 최상의 증거였다.

이 신화의 주역은 젊은 미남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으로, 그의 일대기는 2008년 톰 크루즈가 주연한 할리우드 영화 ‘작전명 발키리’로 더욱 미화됐다. 그렇지만 나치 범죄에 맞선 ‘양심의 봉기’로 미화된 ‘7월 20일’은 실은 역사왜곡에 가까웠다. 이들 순교자는 이념적으로 나치를 지지했을 뿐 아니라 나치 범죄에 경악하기는커녕 스스로 유대인 학살을 포함해 각종 전쟁범죄에 깊이 연루된 자들이었다. 그들은 양심보다는 패색이 짙어가는 상황에서 군사적 계산에 따라 거사를 기도했던 것이다. 서독 사회가 정말로 ‘양심의 봉기’에 관심이 있었다면, 슈타우펜베르크 대령과 동지들이 아니라 오히려 군의 명령을 거부하다 희생된 소위 ‘전시 반역자’들의 복권을 우선시해야 마땅했다. 그들이야말로 양심을 거역할 수 없어 반역을 감행한 진짜 의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서독 사회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과거사에 대한 왜곡은 점차 극복돼갔다. 서독 연방군은 국민의 민주적 통제를 받는 이른바 ‘의회의 군대’가 되어갔으며 동서독 통일 이후 2002년에는 ‘탈영병’ 복권이 이뤄졌고 2009년 들어 전쟁을 공개적으로 반대했거나 평화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공산주의자로서 군부에서 숙청된 사람들이 모두 복권됐으며 부당한 국가 명령에 대해 반역을 감행했던 ‘전시 반역자’들을 오히려 의인으로 기리고 추모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우리 사회와는 사뭇 다른 기조이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반역자까지도 애국자 범주에 포함시켰다는 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애국’ 대신 인권과 평화를 과거사를 판단하는 핵심적 가치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독일에는 한국식 ‘보훈’ 개념은 없다. ‘국가유공자’ 개념도 없다. 국립5 · 18 민주묘지의 거대한 석조 추모탑이 기리는 민주유공자 같은 칭호는 당연히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시민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뜻깊은 장소와 의로운 이름들이 있다. 과연 어느 쪽이 ‘보훈’의 본의에 부합할까?

부산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