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금강공원(金剛公園)은 참으로 많은 이야깃거리를 품고 있다. 이 산책로 저 골짜기마다 얽힌 사연이 그렇다. 특히 일본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동래부사를 지낸 정현덕(鄭顯德·1810~1883)을 떠올린다. 부산시가 2002년 선정한 ‘부산을 빛낸 인물’ 21명 중 한 명이다. 동래 사람인 그는 고종 때 7년 동안 동래부사를 지냈다. 외교와 목민의 발자취가 뚜렷하다. 흥선대원군의 뜻을 받들어 일본 메이지 신정부의 국교 재개 교섭을 거부했다. 동래읍성을 개축하고 동래부동헌 대문인 독진대아문(獨鎭大衙門) 중수, 군사 훈련 등 유사시 대비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동래를 추로지향(鄒魯之鄕·공자와 맹자의 고향처럼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곳을 이르는 말)으로 만들고자 했다. 또 집집마다 충신 효자 열녀가 나오는 순후한 고장으로 탈바꿈시키고자 했다. 그의 열정으로 동래 인심이 바뀔 정도였단다. 또 하나 문인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한시는 물론 한글 가사에도 일가를 이루었으니 임진왜란을 회고하면서 금정산성에서 영도까지 유적지를 돌아본 감회를 노래한 ‘봉래별곡’(蓬萊別曲·여기서 봉래는 동래임)이 그 예다. 그는 동래부사에 이어 승지, 이조 참의, 형조 참판에 올랐으나 흥선대원군과 민씨 일파의 당파 싸움에 휘말려 유배지에서 객사했다.

그의 문인적 자질과 목민관으로서의 다짐이 금강공원에 ‘금강원시비’(金剛園詩碑)로 남았다. ‘정묘년에 내가 동쪽으로 오니 이 고을 백성과 물자가 번성하구나’로 시작하는 이 시엔 목민관으로서의 자신감과 인생을 관조하는 여유가 담겼다. 정묘년은 그가 동래부사로 부임한 1867년(고종 4)이다.

정현덕의 대척점에 일본인 히가시바라 가지로(東原嘉次郞)가 있다. 담배 장사로 큰 돈을 번 그는 금강공원 일대를 개인 정원으로 꾸몄다. 1920년부터 시작된 이 일이 금강공원의 시초다. 그는 계곡물을 이용해 일본식 연못을 만들고 전망 좋은 언덕에 탑도 세웠다. 1931년부터 일반인에게 개방했다. 1940년 11월 10일 황기 2600년을 기념한다며 정원을 동래읍에 기증했다. 이 때 금강원이란 이름이 붙었다. 그 내용이 ‘금강공원 황기 기념비’에 담겨 있다. ‘황기 이천육백년 기념비’라는 제목은 광복과 함께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는 취지로 시멘트로 메워졌으나 그 내력이 고약하기 짝이 없다. 황기(皇紀)는 일본 초대 천황 즉위 시점을 원년으로 삼는 일본식 연호다.

그는 일본의 식민지 조선 지배가 연연세세 이어질 것으로 믿었을 터. 정현덕 부사가 중수한 독진대아문과 함께 내주축성비, 이섭교비 등을 시가지 정리 명분으로 동래에서 옮겨와 정원의 장식품으로 활용하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태연히 저질렀다. 그 속엔 동래 온천을 개발해 돈을 벌고자 하는 일본 자본의 투기와, 이를 방조하는 일본의 식민지 개발 전략이 깔렸다.

두 인물이 금강공원에서 비석으로 이웃하고 있다. 금강공원 케이블카 승강장에서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나오는 ‘동래금강원’ 비석이 하가시바라의 흔적이라면 그 옆 ‘금강원시비’는 정현덕의 자존심이다. 삼각형 입석 형태의 동래금강원 비석이 산책로 앞에 버티고 있으나 금강원시비는 무심결에 지나칠 수도 있다. 독진대아문 등이 제자리 인근으로 옮겨진 것이 다행인 셈.

그 위로 조금 올라가면 만나는 연못이 청룡담이고 내친김에 발길을 더 옮기면 황기 기념비가 화강암 너럭바위에 새겨져 있다. 이 비에서 대각선 방향 위쪽에 13층 규모 석탑인 후락탑이 있다.

무시로 걷던 이 일대를 지난 주말 일삼아 꼼꼼하게 살펴봤다. 치욕의 식민지 역사,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오만함. 장마 끝에 찾아온 무더위에 후줄근하게 젖은 옷만큼이나 입맛이 개운찮다. 동래금강원 비석에도 금강원시비에도 어떤 안내문이 없다. 황기 기념비엔 이끼가 무성하고 후락탑은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두 곳도 애써 찾지 않으면 스쳐지나가기 십상이다. 묻어두기보단 극복의 상징으로 고통스럽게 반추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과거사에 경제 문제까지 꼬일대로 꼬여 있는 한일 관계다. 일본은 여전히 증오의 대상으로 남아 있고 반성하지 않는다. 화해와 협력은 메아리 없는 울림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제75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언제든 일본 정부와 마주 앉을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으나 일본은 아베 신조 내각의 각료 4명이 태평양전쟁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치욕의 역사를 곱씹으며 저들의 대응에 냉정하게 대처하는 일이 우리 몫이다. 혐일도 반일도 아닌 지일과 극일이라는 단일 대오가 그래서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과 애국가를 만든 안익태 작곡가의 친일 행적을 언급한 김원웅 광복회장의 광복절 경축식 기념사는 적절치 않아 보인다.

수석논설위원 jsdo@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