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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추억은 나의 역사이자 미래 /박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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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20-08-13 19:50:54
  •  |  본지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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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지 않은 손님 장마가 올해는 유난히 길다. 가뜩이나 코로나19 때문에 집 안에 있는 시간이 많았는데 장마가 길어지면서 더욱더 짜증이 치민다. 억수 같이 내리는 비 때문에 산책하는 것도 쉽지 않아 오랜만에 집안을 정리하면서 우연히 중학교 때 썼던 노트 하나를 발견했다. 키티 스트커가 여러 개 붙어 있는 조그만 노트였다. 발견한 내가 신기할 정도로 그 동안 있는지도 몰랐다. 노트에는 가정이나 미술 시간, 음악 시간에 필요한 준비물이 쓰여 있었다. 마치 중학교 어린 시절로 돌아 간 것 같았다.

우리에게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서글픔을 자아내게 하지만 추억이 남아 있어 행복할 때가 있다. 살아오면서 많은 추억들 중에서도 어린 시절의 기억은 특히 우리를 행복으로 이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그 시절의 추억은 여전히 우리의 영혼 안에 살아 있어 오늘을 사는 데 많은 힘을 주고 있어서다.

비가 줄기차게 내리고 있지만 어린 시절 쓰던 노트를 발견한 것을 계기로 오랜만에 인사동을 찾았다.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물건들이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또 그 시절의 물건들을 보면 곳곳에 스며있는 추억의 흔적을 만날 수 있어 인사동에 갈 때마다 가슴은 항상 설렘으로 복작거린다. 묻어둔 기억을 들춰내 가슴속에 기쁨이 차오르지만 그 중에서도 유년의 시절 가지고 놀던 물건들을 보면 아무 이유 없이 동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인사동을 걷다 보면 흔하지 않은 물건을 만나는 행운이 뒤따른다. 플라스틱 돼지 저금통이 흔하지만 청동으로 된 돼지 저금통은 귀했다. 돼지 저금통에 대한 추억을 누구나 가지고 있겠지만 나는 조금 특별했다. 나는 어린 시절 유난히 만화를 좋아해 만화 가게 구석에서 하루를 보낸 적이 많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만화 주인공에 빠져 저녁 시간을 놓친 나는 어머니에게 머리를 쥐어 박히고서야 자리에서 일어서곤 했다.

어머니의 야단도 소용이 없었다. 만화는 나에게 정보의 바다였고 상상 속의 미래가 거기에 다 있었다. 하지만 만화를 보면서 한없이 꿈을 키우기란 어린 나에게는 무리였다. 어머니의 야단보다 만화를 보는 것이 더 힘들었던 것은 돈을 내야만 만화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용돈으로는 군것질과 만화를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만화는 왜 그렇게 장편이었는지…. 어린 나에게 비용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돼지 저금통을 터는 것이었다. 한 번에 플라스틱 돼지 저금통을 박살내면 어머니에게 야단 맞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칼로 저금통 입구를 조금 넓혀서 안에 들어 있는 동전을 끄집어내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주변에 가족이 있나 없나를 살피면서 동전을 끄집어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또 혹시나 동전을 한꺼번에 많이 빼면 들킬까봐 처음에는 조금씩 끄집어내었다.

돼지 저금통을 털어 만화 가게의 출입이 잦아졌다. 그렇지만 몇 개의 동전은 만화 몇 편 밖에 볼 수가 없었다. 감질이 난 나는 조금씩 동전의 양을 늘려갔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어느 날 외출하고 돌아오신 어머니에게 돼지 저금통 터는 것을 들키고 말았다. 그 사건으로 엄청나게 혼이 났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며 어머니는 플라스틱 저금통을 버리고 비싼 청동으로 된 돼지 저금통을 구해오셨다. 그 다음부터 나는 정보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만화 가게 출입을 하지 않으면서 나는 친구들과 떠벌일 이야기거리가 사라져버렸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을 끓이면서 그냥 만화 가게 앞만 서성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어머니가 참으로 야속했지만 지금 그것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세상에 대한 감흥은 사라지고 없는 지금 인사동에서 손때 묻어 있는 물건들을 통해 어린 나를 만난다. 사소한 것들은 당시에는 고통과 환희, 기쁨과 슬픔을 주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슬픔과 고통은 슬며시 잊어버리고 아름다운 추억만 가슴에 남긴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기억해야 할 것이 많아지나 보다. 긴 장마에 짜증이 나지만 추억을 파는 곳으로 떠나는 여행은 긴 장마가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 본다. 삶이 진부하게 느껴질 때마다 어린 시절 벽장 속에 숨겨 두었던 꿀단지에서 꿀을 훔쳐 먹듯이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을 가끔은 만나보는 것이 또 다른 즐거움이다.

산다는 것은 떡시루에 켜켜이 팥고물을 쌓듯이 추억을 차곡차곡 쌓아 올라가는 과정이다. 사소한 것들이 팥고물처럼 쌓이고 쌓여 개인의 역사를 만든다. 역사를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자. 오늘의 내가 역사의 주인공이다.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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