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쟁이 김훈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야겠다. 그는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라고 했다. 나는 그가 ‘보수’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한동안 알지 못했다. 그러다 최근 그가 한 언론사 앵커와 나누는 얘기를 통해 그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에게 보수란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고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상을 소중히 지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목격한 것은 그게 너무 쉽게 파괴되고 있다는 것이었고, 부서진 생명들이 고통 속에서 절규하고 있는데도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이었다.
그는 말했다. “1년에 재난 노동 현장에서 450명이 죽고, 고층에서 추락해 죽는 노동자가 250명입니다. 이것이 일상화되고 만성화되니까 남의 고통을 이해하고 고통을 느끼는 감수성이 이제 마비되어 가는 것이죠. 재난 참사의 문제라기보다 인간성에 관한 문제가 된다”고 했다. ‘남의 고통을 이해하고 고통을 느끼는 감수성’이 사라진 사회는 유지가 불가능하다. 김훈이라는 보수주의자가 산재 노동자의 고통에 동참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 한 사회를 사회로서 존립하게 만드는 근원적인 인간성의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산재 사망자가 2020명이었다. 사고나 직업병으로 죽은 사람 모두 합친 숫자다. 산재 사망률은 선진국 클럽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부동의 1위다. 하루 대여섯 명 꼴로 살해당한다. 304명이 죽임을 당한 세월호에 견주면 한 해 세월호 참사가 6건 난 셈이다.
지난 4월 경기 이천시 물류창고 화재 참사로, 아니 ‘산재 참사’로 서른여덟을 태워 죽였다. 똑같은 사고로 12년 전 이천 냉동창고에서 마흔 명을 죽였다. 12년 전과 무엇이 달라졌는가? 김훈의 말처럼 “우리는 왜 죽은 자리에서 거듭 죽고, 넘어진 그 자리에서 거듭 넘어지면서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변하지 못하는 것인가?”
12년 전 냉동창고 업주에게 떨어진 벌금은 고작 2000만 원이었다. 마흔 명을 죽였는데 기업이 감당해야 할 노동자 목숨값은 한 명당 겨우 50만 원이었다. 소를 잃으면 외양간을 고치겠지만, 시시한 노동자가 죽으면 헐값의 또 다른 노동자 목숨값으로 떼우는 게 백 배 남는 장사니까 죽인 자리에서 거듭 죽이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신년사에서 2022년까지 산재 사망 사고를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2년을 앞둔 지금 바뀐 건 없다. 산업안전을 강조하면 기업주들은 비용 상승으로 ‘경쟁력 확보’가 어렵다고 엄살을 피운다. 오직 국내총생산(GDP) 성장의 중독에 빠져 노동 안전은 항상 말석이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어슐러 K. 르귄의 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가상의 도시 오멜라스는 아름답고 풍요로우며 모든 시민이 행복을 누리는 곳이다. 왕도, 노예도, 죄인도 없다. 그런데 이 풍요와 행복의 비밀은 그 도시의 지하 방에 감금되어 학대받는 한 아이의 지독한 불행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아이를 풀어주고 씻겨 지상으로 데려 나오면 그 순간 오멜라스가 누리는 풍요와 행복은 한순간에 무너진다는 것이다. 시민은 그 아이의 존재가 가진 ‘불편한 진실’을 알면서도 외면했다. 오멜라스가 주는 풍요를 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이는 그 아이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는 오멜라스를 떠난다. 정의가 없는 행복은 불가능하다는 걸 깨우친 사람들이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위험을 외주’한 채 누리는 비대면 자본주의의 오멜라스를 우리도 떠날 수 있을까? 마침 정의당이 21대 국회의 1호 법안으로 노회찬 의원이 20대 국회에서 남긴 숙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발의했다. 일찍이 영국에서는 일명 ‘기업살인법’이라고 했던 법안이다. 이 법안은 기업 증오법이 아니다. 처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누구나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보호하고, 평등하게 존엄할 권리를 보장하는 법안이다. 그리고 노동자의 생명 안전을 지키는 것은 안전보장(안보)의 가치이며, 보수주의자의 몫이기도 하다. 보수, 진보를 넘어 노회찬의 빈소에 눈물을 뿌렸듯 노회찬이 남긴 숙제를 21대 국회에서 완성하는 것을 보고 싶다.
오는 23일은 고 노회찬 전 의원의 2주기를 맞는 날이다.
이창우 정의당 전국위원·고 노회찬 의원 2주기 시민추모위원회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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