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질학자의 장점 중 하나는 여행을 많이 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곳을 간다는 것은 언제나 마음을 들뜨게 한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30여 개국의 수많은 도시를 다녀온 것 같다. 대부분은 국제학회나 지질조사를 위한 출장이라 일정이 촉박하지만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서 꼭 방문하는 곳이 박물관이다. 박물관을 가게 되면 항상 시간이 아쉽다. 소장품을 자세히 보기 위해서는 하루 종일도 부족한데 보통은 다른 일정 때문에 서너 시간 머무는 것이 고작이다.

국제박물관협회(ICOM)는 박물관을 “교육·연구·오락을 위해 인류와 환경의 유무형 유산을 획득·보존·연구·전달·전시하는 항구적 공공시설’로 정의한다. 박물관은 종류에 따라 예술·문화·역사나 과학적 중요성을 가지는 소장품을 보존하고 전시한다. 지질학을 전공하는 필자는 자연사박물관(Natural History Museum)을 가장 좋아한다. 자연사박물관은 동식물과 지질·생태·인류 등 자연사와 관련된 소장품들을 전시하는 과학박물관이다. 전 세계 대도시에는 대부분 그 나라를 대표하는 자연사박물관이 위치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자연사박물관은 오스트리아의 빈 자연사박물관(Wien Naturhistorisches Museum)이다. 이 박물관은 오스트리아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 1세가 1889년 설립했다.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의 맞은편에 함께 설립한 빈 미술사박물관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자존심으로 알려져 있다. 빈 자연사박물관은 전시품만 2000만 점 이상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자연사박물관이다. 영국의 선데이 타임즈가 선정한 세계 10대 박물관 중에서 과학 관련 박물관으로는 유일하게 선정된 곳이다.

주요 전시물은 지구 역사의 모든 시대에 관한 자료들이다. 암석과 화석 등 지질 관련 시료들을 포함하여 멸종동물이나 멸종위기 동물들의 박제 표본, 식물 등 자연사와 관련된 거의 모든 분야의 다양한 시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2012년에는 세계 최대의 운석 전시관을 오픈했는데 무려 1100개 이상의 운석을 보유하고 있어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국내에도 여러 개의 자연사박물관이 있다. 서울의 서대문자연사박물관, 태백의 고생대자연사박물관, 공주의 계룡산자연사박물관, 부산의 해양자연사박물관이 유명하지만, 아직까지 국립자연사박물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 1995년에 건립추진위가 구성되어 사업이 진행되다가 IMF 외환위기 이후 긴축재정으로 중단됐다. 2001년에도 예비타당성 조사가 진행됐지만 경제성이 낮다는 평가로 취소되었다.

국립자연사박물관의 건립이 어려운 이유는 20여 년의 긴 공사기간과 천문학적인 비용 부담일 것이다. 빈 자연사박물관 소장품의 가치를 매길 수 없지만 대략 추산해도 수 십조 원 이상일 것으로 보이며, 100년 이상의 오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소장품을 늘려가고 있다. 한국은 최소 5000억 원 이상의 재원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비용을 들여서 왜 국립자연사박물관을 만들어야 할까. 과거의 박물관은 진귀한 수집품들을 보존·전시하고 대중에게 공개한다는 의미로 시작되었지만,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박물관은 연구와 교육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외국의 대형 자연사박물관들은 이미 다양한 자연과학 연구분야에서 국제적 중심 역할을 하고 있고, 매년 수많은 학생들이 자연사박물관 관람을 통해 지구의 역사에 대해 배우고 미래의 과학자를 꿈꾼다. 물론 이 같은 교육은 책을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박물관의 정체성은 진품을 체험하는 것이다. 진품이 주는 감동은 무엇과도 비할 수 없다. 루브르 박물관의 자그마한 모나리자 앞에 관람객이 몰리는 것 역시 같은 이유일 것이다.

부끄럽지만 OECD 국가 중 국립자연사박물관이 없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이는 국격의 문제일 것이다. 많이 늦었지만 한국의 과학 꿈나무들을 위해서라도 국립자연사박물관이 조속히 설립되기를 희망한다.

임현수 부산대 지질환경과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