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여름이다!’ 오래된 유행가의 첫마디는 찬란한 계절처럼 떠들썩하고 들떠 있다. 다섯 음절, 한껏 감정을 넣더라도 여섯 음절에 지나지 않는 외침이 우리의 수많은 기억세포를 건드리고 세포는 낱낱이 감상을 압축시켰다 폭발한다. 하지만 구물거리는 장마의 하늘이 활짝 개더라도 이전과 달리 뜨거운 태양을 무릅쓰고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계절 탓에 가슴은 부풀어 오르겠지만, 자꾸 옆 사람의 숨에 신경을 쓰게 될 테니 말이다.

변화는 늘 그렇듯, 갑작스레 닥친다. 이어지는 급보 속에 지난 겨울과 지난 봄은 그냥저냥 흘려보내고 말았다.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르고 보니 다시 ‘그냥 여름’이다. 가장 덥지는 않겠으나 예년보다 덥다는 기상 전문가의 전문적 추단은 자세히 따지려 들면 안 된다. 그저 올여름도 덥네요 정도, 멀건 싱건지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도시가 머지않아 열파에 갇힌 섬이 될 것은 누구나 경험해서 알고, 또 올해 열섬의 일상에서 벗어나기는 예전처럼 쉽지 않을 예상이다.

“언제나 충만한 힘을 갖고 싶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아마도 일상적 생활 속에서 졸고 있는 감정을 일깨우는 데 필요한 활력소일 것이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한 달 동안에, 일 년 동안에 몇 가지의 희귀한 감각들을 체험해 보기 위하여 여행을 한다. 우리들 마음 속의 저 내면적인 노래를 충동질하는 그런 감각들 말이다.”

장 그르니에의 ‘섬’을 처음 읽을 당시, 경제적으로 월등한 저들 형편이며 휴가 풍속만 눈에 들어왔던 기억이 있다. 아직 산업화를 부르짖던 그때 어른들의 ‘빨리빨리’를 스스로 내면화시킨 풋내기였던 탓일 수 있다. 충만, 활력소, 희귀한 감각, 내면적 노래 따위, 노동의 나날과 대비되는 느릿느릿함을 이해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 노래할 만한 나이도 되고 나라 형편도 그만해졌는데, 아뿔싸 여행은커녕 그르니에의 제목처럼 오도카니 섬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것도 뉴노멀의 한 가지일까. 탈주하기 어려운 섬에 갇힌 형국은 언제 다시 방문할 수 있을지 모를 열대의 섬보다 절해고도를 먼저 떠올리게 한다. 자연 지리의 묘사이기보다 문학적 수사인 절해고도는 먹물 든 치들 사이에는 정적을 내모는 유배지 구실이었다. 먹고 살기 좋은 바닷가며 강가 모두 천시, 외면하고 굳이 골짜기에 들어앉기를 바라마지 않던 사람들에게 섬은 고립과 그에서 연유한 절망이었다. 우리 문화사에서 절망을 이기고 섬에서 대성한 유배자는 희귀한데, 정약전, 김정희 두 사람 정도나 꼽을 만할까.

섬이 가두거나 갇힌 곳이라는 부정적 기억은 우리에게만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나폴레옹을 가둔 세인트헬레나섬이나 신대륙에 발을 딛기 전 이민자가 갇혀 있게 마련인 뉴욕의 리버티섬 같은 예가 서양에도 있다. 하지만 서양 문화에서 섬은 긍정적 존재감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아마 그것은 고대 그리스 문명까지 거슬러 올라갈 텐데, 좀 무모한 생각이지만 여행에 관한 그르니에의 언급도 20세기가 배경인 오디세이아 비슷한 느낌이다. 이보다 최근이라면 미셸 투르니에의 소설 ‘방바르디, 태평양의 끝’도 있으려니와, 거슬러 올라가면 투르니에의 모델인 로빈슨 크루소가 표착한 곳도 섬이며 유토피아나 플라톤이 전한 아틀란티스도 섬이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이들을 모은다면 섬에 대한 서양의 생각을 알차게 한 권 족보로 엮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오늘 섬의 족보를 마친다면,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와 사회운동가 펠릭스 과타리에서 끝을 맺어야 마땅하지 싶다. 밀착한 동지였던 둘은 공동으로 집필한 책이 많고 따라서 사상의 경계도 불분명하다. 철학자 가운데 이와 비슷한 사례는 내가 아는 한 아마 송나라 때 정호, 정이 형제 정도가 아닐까 싶다. 두 사람의 전집을 편찬한 주희도 어떤 말이나 생각을 누구에게 귀속시켜야 옳을지 결정하지 못하는 어려움에 부딪힌 경우가 숱하다. 둘로 나누기 힘든 들뢰즈와 과타리는 철학의 쌀이라고 할 수 있는 ‘개념’의 이미지로 뼈대, 척추 등과 함께 군도를 언급한 적이 있다. 여기서 군도는 물론 떼도적이 아니라 무리를 이루고 있는 크고 작은 섬, 곧 섬들의 집합을 가리킨다. 프랑스 철학자이지만 드물게도 이웃한 섬나라 영국 철학과 가까워 군도를 떠올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군도에서 끝을 맺은 섬의 족보는 이런 결론을 내리는 것이 합당하지 싶다. 육지 중심의 전통 관념에서 섬은 격절된 또 다른 육지일 테지만, 지질학이나 생태학의 도움을 받은 인문학은 섬이 정적인 외관과 달리 주위를 둘러싼 동적인 바다와 하나로 이어져 있으며 육지와 섬이 관계하듯, 섬과 섬도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관계와 연결에서는 윤리가 성립하게 마련이고 이것은 섬들과 같은 연대의 윤리일 것이다. 만인이 만인에 대해 섬이 되어버린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런 윤리일 것이다.

임형석 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