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7년(숙종 24) 기근이 한반도를 덮쳤다. 12월 28일 자 ‘숙종실록’ 기사에 따르면, 그해 전국에서 굶어 죽은 사람은 2만1546명이었다. 이 숫자는 전체 사망자의 20~30%도 되지 않았다고 했으니, 실제 아사자는 10만 명을 넘었을 것이다. 기근은 이 해만의 것이 아니었다. 2년 전인 1695년에도 기근과 전염병으로 사망자가 쏟아졌다. 1693년에 비해 1699년 11월 현재 인구가 141만 6274명이 줄었다고 하니, 1695년과 1697년의 참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흉년이 들면 풀뿌리를 캐고 나무껍질을 벗겨 먹었다. 하지만 그런다 해서 죽음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강원도 고성에서는 굶주리다 못해 형제를 잡아먹는 경우까지 있었으니 말이다. 아사자가 쏟아지자 숙종과 관료들은 청(淸)으로부터 쌀을 수입하기로 결정했다. 조선의 호소를 들은 청은 2만 석은 팔고, 1만 석은 무상으로 제공하기로 하였다. 4월 말에 쌀이 압록강 가에 도착했으니, 당장 급한 불은 끄게 된 셈이었다.

급할 때면 이웃에 도움을 청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웃이 청이라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1636년 청에 항복한 이래 청은 조선의 불공대천의 원수였다. 힘에 밀려 신복(臣服)은 했지만, 마음까지 내어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효종이 북벌(北伐)을 외친 것이 아니었던가.

항복의 치욕은 조선 스스로 불러온 것이었다. 광해군은 일락서산(日落西山)의 명(明)과 욱일승천의 청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 하였다. 그것이 조선이 택해야 마땅한 현실적 외교 노선이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내쫓은 세력은 친명(親明)을 택하고 청과 대립했다. 현실보다는 명분을 택했던 것이다.

자신들과 의도적으로 각을 세우는 조선을 청은 어떻게 보았던가.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석 달 전 청의 마부대(馬夫大, 병자호란 때 조선을 침공한 장수)는 이렇게 말했다. “한(汗, 청 태종)은 여러 왕자들과 ‘조선은 아녀자와 같은 나라인데 무얼 믿고 저러는가?’ 하며 늘 웃는다.”

변변한 군사력도 없는 조선이 명의 편을 들며 자신들과 각립(角立)하는 것을 비웃었던 것이었다. 현실을 외면한 결과는 참극이었다. 인조는 남한산성 아래 차가운 땅에 엎드려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올리며 목숨을 구걸했고, 아무 죄도 없는 수많은 백성이 청으로 끌려가 노예가 되었던 것이다.

더할 수 없는 비극을 겪은 조선은 무엇이 변했던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조선이 청에 곡식을 달라고 청하던 그 순간까지도 지배층은 백성에 대한 가혹한 수탈을 멈추지 않았다. 목면 농사가 흉년이 들자 군포 독촉을 걱정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사람이 나오기까지 했던 것이다. 숙종은 어린아이를 군적(軍籍)에 올리고(황구첨정·黃口簽丁), 죽은 이에게까지 군포를 거두는 학정(虐政, 백골징포·白骨徵布)을 멈추어야 한다고 했지만, 그 자신도 조정의 신하들도 마땅한 대책과 실천의지가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백성의 삶이 이랬건만, 명을 위해 청에게 복수한다는 실행 불가능한 계획을 세우고 군사를 길렀다. 하지만 그 군사는 서울의 왕과 고위 관료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명의 태조·신종(임진왜란 때 조선 파병을 결정한 황제)·의종(명의 마지막 황제)을 기리는 대보단(大報壇)을 지어 명의 은혜를 가슴에 새겼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었지만, 부패와 무능으로 자멸한 명은 여전히 조선의 종주국이었던 것이다.

굶어 죽는 백성을 구하기 위해 청에 쌀을 청한 것을 두고 정호(鄭澔)는 숙종에게 눈앞의 굶주림을 모면하기 위해 명을 위해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을 잊은 것이 수치스럽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뒷날 영의정까지 오른 정호, 굶어 죽을 가능성이 0%였던 정호, 명분주의자인 정호에게, 전쟁으로, 굶주림으로 죽는 백성은 안중에 없었을 것이다.

분단상황에서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현실은 국민의 안녕일 것이다. 그것은 전쟁 없는 평화에 기초한 것일 터이다. 최근 북한과 관계가 소란스럽기에 백성의 안녕과 평화를 저버렸던 조선의 명분주의 외교를 문득 떠올려본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