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나는 밤새 그곳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잠들어 있는 동안 투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었고, 새들이 목을 축이는 소리에 알 수 없는 설렘을 느꼈으니까. 빗물로 뿌리 깊숙이 몸을 적신 정원의 나무와 꽃들과 함께 나 또한 때맞춰 내려주는 비를 고마워했다. 내가 주는 물로는 꽃들의 갈증이 해소되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를 앞두고 내린 이 비는 한 해의 풍요를 약속해 주는 신의 선물이었다.

일 년 중 태양이 가장 높이 뜨고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 그 이름처럼 여름에 이르는 절기이다. 농사가 중요했던 시절에는 하지가 지나도록 비가 오지 않으면 왕과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비를 바라는 기우제를 올렸다. 다행히 올해는 하지(오는 21일)를 앞두고 흠뻑 비가 내렸다. 이제 수확한 마늘과 양파를 햇볕에 말리고 고추밭도 매어야 한다. 또 감자를 캐어야 할 시기이다.

엄마와 함께 가꾸고 있는 정원에는 열매를 맺는 나무와 꽃 그리고 다양한 농작물이 자연스레 어우러져 자라고 있다. 수확의 기쁨을 기대하는 엄마는 감자를 캐는 내내 “고맙다, 고맙다”를 되뇌었고, 나는 감자 꽃을 보고 “예쁘다, 예쁘다”하며 감탄했다. 그러자 엄마는 “이거 너 해라”하며 감자 꽃을 모아주셨다. 나는 작은 수선화처럼 귀여운 감자 꽃에 라벤더와 로즈마리 같은 허브 잎을 더하여 화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달랑거리는 귀걸이처럼 예쁜 보리수 열매와 푸른 수레국화도 넣었다. 둥글게 모양이 잡혔을 때 쯤 활짝 핀 붉은 다알리아 한 송이를 꺾을 용기도 생겼다. 싱그러운 정원을 엮어서 만든 ‘6월의 화관’이었다.

나는 감자밭 이랑 사이를 이리 저리 살피고 있는 엄마를 불렀다. “엄마, 지금은 한 낮이니 좀 쉬었다 해요.” 그러면 엄마는 “네가 있으면 내가 일을 못한다. 지금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하셨다. 겨우 밭에서 나와도 매실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쑥갓을 다듬으셨다.

“엄마, 모자 벗고 이거 써 봐요.” 흘러내린 앞머리를 한쪽으로 쓸어 넘긴 뒤 감자 꽃을 넣어 완성한 ‘6월의 화관’을 엄마의 머리에 씌워 드렸다. 내가 하도 불러내어 마지못해 호미를 놓으신 엄마가 화관을 쓰자마자 활짝 웃었다.

낮의 길이가 가장 긴 하지 즈음이 되면 벼농사를 짓는 아시아지역은 더 부지런히 움직일 준비를 한다. 태양의 따뜻한 기운이 늘 목마른 유럽의 몇몇 나라에서는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축제가 시작된다. 이러한 전통이 지금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나라, 라트비아의 하지축제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바로 ‘화관’이다.

하지가 되면 남자들은 떡갈나무 잎으로, 여자들은 꽃과 잎을 모아 화관을 만든다. 태양의 기운이 가득한 낮 동안 숲과 들에서 예쁜 꽃들을 모으며 하지의 태양을 맘껏 즐기는데 그 모습은 꽃을 찾아드는 벌과 나비와 다를 것이 없다. 이렇게 모은 야생화들로 자신의 머리에 딱 맞는 둥근 화관을 만드는 동안 손끝에는 초록물이 들어가고 푸르른 자연의 생기가 온 몸을 적실 즈음 멋진 화관이 완성된다. 그것을 머리에 쓴 사람들은 하지의 낮이 저물고 밤이 새도록 숲에서 자연의 풍요를 만끽하며 축제를 이어간다.

하지를 맞아 머리 위에 아름다운 꽃이 가득한 화관을 쓴다는 것! 그것은 태양의 힘찬 에너지를 머금은 아름다운 꽃들과 한 몸이 되어 태양을 맞이하는 일이다. 가장 단순하고도 완벽한 원형 모양으로 엮어 무한한 생명력을 덧입는 일이다.

그때 자신이 꽃의 일부일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작은 나무, 돌, 바람 한줄기와 다르지 않다는 마음이 들면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가장 큰 세상을 배우게 될 지도 모른다.

지구의 모든 생명에게 공평하게 쏟아지는 태양을 향하여 이날 하루만이라도 손을 뻗어보자. 사소한 모든 일들에 대한 감사와 심장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이 뻗어나가는 나무의 가지처럼, 울타리를 휘감는 장미넝쿨처럼, 향기를 머금은 치자 꽃처럼 아름답게 성장하도록 도울 것이다.

시원한 물을 가지러 다녀온 사이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어린 백일홍과 코스모스들을 울타리 아래에 옮겨 심고 계셨다. 감자 꽃 화관을 쓴 엄마가 6월의 태양 아래에서 빛나고 있었다. 나는 엄마를 부르려다 말고 호미를 손에 쥐었다. 빗물을 머금은 흙에 태양의 기운이 닿아 보슬보슬해진 틈에서 꽃도 나도 함께 자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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