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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행복한 일탈 /조갑룡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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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20-05-11 19:06:38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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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남 장녀 결혼식이 다가온다. 인천의 동서 가족이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결혼식에 참석하겠단다.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결혼식 당일에 왔다가 식 마치고 바로 돌아갔으면 하는 게 나의 속마음이다. 동서지간의 ‘얼콰한’ 분위기와 자매의 정겨운 수다가 갈림길에 놓였다. 아이들의 귀엣말, 적당히 기울어진 연인의 어깨, 이팝나무 사이로 지는 새벽 달…. 세상이 험해지면 이런 미미한 일상들이 먼저 사라지고 ‘생활 속 거리두기’와 같은 권장되는 일이 우선이다.

창살 없는 감옥에서 놓쳐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을 저민다. 일상의 행복이 뭔지 모른 채 그렇게 살아온 우리들, 하지만 이 코로나 지나가면 우린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또 그저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길을 잃은 뒤에야 비로소 자신을 찾기 시작한다’는 미국의 사상가 소로의 말이 생각난다. 그래, 우리 소소한 일상에 한 번이라도 감동했던 적이 있었던가? 이제라도 일상을 찾아 나서 보자.

나는 일상을 조금 다르게 적극적으로 사랑하기로 했다. 우선 웅크리고 있을 몇몇 친구에게 손편지를 쓰는 것, 이름하여 행복한 ‘일탈’이다. SNS를 통한 ‘마스크 없이 살 수 있는 그 날을 기다리면서 파이팅하자’와 같은 상투적인 말이 아니라 나와 친구가 함께 동(動)하는 충격요법인 셈이다. “친구야! 잘 있제? 윤기 넘치던 순간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갑자기 보고 싶어 이은상 작사 박태준 작곡 ‘동무생각’의 가사를 적어 본다. ‘…청라 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꼭 한 번 들어보거라….” 두 녀석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테너 임웅균의 노래가 좋았고, 정직하고 치열한 손편지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얼큰하게 끓여보고 싶다고 한다. 새벽녘 만년필의 사각거림이 의도한 바를 이끌어내었다. 고졸(古拙)한 미소가 번진다. 존재계의 질이 높아졌다.

일탈의 사전적 의미는 사회적 규범과 상식, 가치에서 벗어나는 행위 등을 말하지만, 일(逸)은 ‘편안할’ ‘달아날’의 뜻이 있고, 탈(脫)에는 ‘벗을’ ‘기뻐할’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일탈은 새로움에 대한 목마름이자 천편일률적인 곳으로부터의 탈출이기도 하다. 삶이 거기서 거기일 때 돌파구로서의 각성(覺醒)과 청량(淸량)의 역할을 한다. 유통기한과 되돌아와야 할 일상이 있기에 일탈은 더욱 짜릿하고 달콤하다.

3월에 800㎞ 도보여행을 계획했지만, 시절인연 때문에 뒤로 미루고 집에서 조곤조곤 정중동(靜中動)의 삶을 즐기기로 했다. 평생 읽은 책이 2만 권이 넘었다는, ‘책만 읽는 바보’라고 자칭한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의 광기와 페이소스에 빙의(憑依)되어 주야장천(晝夜長川) 책에 빠졌다. 그것도 만화책이다. ‘미스터 초밥왕’이라는 4권짜리부터 시작하여 지금은 55권으로 된 ‘만화 중국 고전’을 읽고 있다. 5월 한 달로는 안 될 것 같다. 부모님 눈치 안 보고 실컷 만화 보는 꿈이 무르익어가고 있는 중이다.

일탈은커녕 일상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팍팍한 삶에 대한 반성의 기회를 코로나가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57일간의 ‘사회적 거리두기’가 종료되고 ‘생활 속 거리두기’로 완화되었지만, 찜찜함은 여전히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참에 일상과 일탈의 한 끗 차이에서 나만의 축제를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모두가 원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찾아보고 베토벤 교향곡 1번에서 9번까지를 연속으로 듣는 것, 가르마 방향을 바꿔보는 등의 실용적인 딴짓거리를 해보는 것이다. 그것은 소소한 결단과 작은 기쁨이 선순환의 시너지가 되어 삶에 신선한 에너지를 줄 것이다. 이쯤에서 색다른 용기를 내어보자. 어느 날 아침, 타인의 시선에 자신의 마음을 그냥 묻어 버리지 말고 ‘나 오늘, 신록(新綠)에 취해 출근 못 하겠어요’라는 행복한 일탈을 감행하는 것이다.

‘멋지다’는 찬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얼마간은 사무실에 얼얼한 생기가 돌 것이다. 에라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시간 끌지 말고, 오늘 밤 당장 달빛 꽃그늘과 함께 야반도주(夜半逃走)라도 해버리면 어떨까!

전 부산영재교육 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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