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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끼니] 갱(羹)도 아니고 죽(粥)도 아닌 ‘갱죽’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4-29 19:44:49
  •  |  본지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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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되다가 말아 어정쩡하게 된 상황 또는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를 두고 ‘죽도 밥도 아니게 됐다’ ‘죽도 밥도 아니다’는 표현을 쓴다. 이 표현에 딱 어울리는 음식이 신김치와 식은밥 그리고 마른멸치를 넣고 푹 끓여낸 갱죽이다. 갱죽의 첫 번째 미덕은 증량이다. 국물을 충분히 머금은 밥은 부피가 늘었다. 식은밥 두 그릇이면 한 솥 분량이 됐고 온 가족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었다. 늘어난 건 밥이 아니고 물이다. 일종의 눈속임이다. 그러니 충분히 배불리 먹었다 싶은데 금방 배가 꺼졌다.

추억이 담긴 음식, 갱죽.
조선 시대에는 탕(湯)과 갱(羹)을 구분했다. 1766년 편찬된 ‘증보산림경제’에서는 탕은 국물 위주 음식이고, 갱은 국물이 적은 음식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아욱갱 조리법은 ‘아욱에 마른새우를 넣고 장에 끓인다’고 기록돼 있다. 일종의 아욱된장찌개다. ‘해동죽지’에 나오는 효종갱은 조선 사대부의 해장국이자 배달음식의 원조로 알려져 있다. ‘효종갱은 광주 성내 사람들이 잘 끓인다. 배추속대, 콩나물, 송이, 표고, 쇠갈비, 해삼, 전복, 토장(된장)을 풀어 온종일 푹 고아 만든다’고 기록했다. 화려한 재료의 면면을 보면 효종갱은 국이라기보다는 전골에 가깝다.

갱죽(羹粥)이라는 모호한 이름의 단서가 여기 있다. 갱은 건더기가 넉넉해야 하는데 갱죽의 건더기는 기껏해야 밥과 김치다. 갱이라 부르기 민망하다. 죽(粥)은 멥쌀을 불려서 끓이는데 갱죽은 이미 다된 밥을 사용한다. 죽도 아니고 그렇다고 국밥도 아니다. 갱이라 부르긴 민망하고 그렇다고 죽도 아닌, 그래서 경계가 모호한 음식이다.

다른 관점도 있다. 영남 내륙에서는 ‘갱시기’라고도 한다. 경북 상주가 고향인 소설가 성석제는 이렇게 해석한다. “그러고 보니 갱죽은 ‘다시 고친다’ 할 때의 갱(更)인지도 모르겠다. ‘갱시기’는 ‘갱식’에서 나온 말이며 밥과 반찬에서 다시 모습을 바꾼 음식이라는 뜻이 되겠다.” 그러니까 갱시기는 이미 쓸모가 없어진 식은밥과 신김치를 한데 모아 새로운 생명을 부여한 음식인 것이다.

먹거리가 넉넉지 못하던 시절 지겹도록 먹어야 했던 갱죽은 이제 추억의 음식이 되었다. 너무 일상적이고 너무 쉽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은 외식업 아이템이 되지 못한다. 갱죽 따위를 눈여겨보는 외식업자는 없다. 그런데 부산에는 ‘김치국밥’이라는 이름으로 갱죽을 파는 음식점이 더러 있다. 대충 익힌 중국산 김치에 속성으로 끓여냈기에 예전 그 맛은 아니지만 추억을 곱씹을 정도의 온기와 정서는 남아 있다.

그래도 끝내 아쉬운 점은 멸치다. 갱죽을 끓일 때 멸칫국물을 따로 내는 곰살궂은 짓은 사치다. 마른멸치를 같이 넣고 푹 끓인다. 불어터진 멸치는 처음 잡힐 때처럼 부드러운 상태가 된다. 꼴에 그것도 고기라고 씹는 맛이 제법 각별했다. 나는 가끔 흐물흐물하고 쌉싸름한, 갱죽에 빠진 멸치가 그립다. 오늘은 마른멸치 넉넉히 넣고 갱죽 한 솥 끓여야겠다.

맛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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