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영국 방송 BBC의 유명한 인터뷰 프로그램에서 우리나라 강경화 외무부 장관이 한국식 코로나19 대처에 관해 피력한 발언이 화제가 됐다. 봉쇄보다 투명성·개방성에 주안점을 두는 과학적 질병 관리방식이 우리 사회의 “활기찬 민주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강 장관은 설명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정부·여당을 힐난하는 데 여념이 없는 비판가들은 이 발언을 얼토당토않은 자화자찬이라고 깎아내렸지만, 국내외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더구나 많은 국민에게는 우리가 이룩해낸 민주주의를 다른 곳도 아닌 의회민주주의의 세계적 본산을 향해 떳떳이 자화자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쾌거로 느껴졌다. 해외 어느 언론도 강 장관의 발언이 과하거나 어색하다고 토를 달지 않았다.
확실히 대한민국의 국격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아쉽고 울화통 터지고 절망스러운 면이 여전히 많지만 그래도 지구상 여러 나라와 견주어볼 때 비교우위에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민주주의란 본디 대통령직선제나 보통선거 등 특정 제도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주어진 제도를 끊임없이 문제 삼으며 이념적, 물리적 한계를 과감히 넘어서는 역동적인 과정 자체가 민주주의다. 대한민국은 제도적 완결성 여부와는 별개로, 어떤 것에 대한 문제 제기도 더는 불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전혀 손색 없는 민주국가이다. 현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매도하는 세력은 그런 헛소리도 허용되는 민주국가가 수많은 이의 헌신과 희생을 통해 이룩된 것임을 깨닫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초유의 국제적 재난을 겪으며 새삼스럽게 북돋워진 우리나라에 대한 자긍심은 오래 우리를 옥죄어온 의례적 애국심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우리의 민주적 체제에 대한 자긍심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만 가능한 보편적 가치에 대한 믿음과 합의이다. 대한민국은 부강한 국가여서가 아니라 더는 국가의 이름으로 인간의 소중한 생명과 자유, 정당한 권리 향유와 정치적 불복종을 탄압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런 보편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굳건히 뒷받침해준다는 점에서 구성원 모두가 힘을 합쳐 지켜내야 할 민주국가인 것이다.
만약 애국심이 이러한 민주국가에 대한 헌신적 지지가 아니라 오로지 부강한 국가의 국민이 되고 싶은 욕심에 불과하다면, 이와 같은 눈먼 애국심을 조장하는 국가는 수호는커녕 빨리 전복시켜야 옳다. 이런 무소불위 국가는 국가의 목적을 인간의 삶보다 우선시하기에 국내외적으로 지극히 폭력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에게는 생소하지만, 50대 이상 세대에게는 학창시절 많이 들어본 아주 의미심장한 개념이 있다. 바로 ‘국체(國體)’ 개념이다. 말 그대로 보면, 국가가 마치 우리 몸처럼 나눠질 수 없는 하나라는 것이다. 첫 뉘앙스부터 아주 반민주적이다. 이 개념의 발원지는 역시 근대 일본이다. 이미 메이지 유신 이전부터 소위 국학의 전통 속에서 자리 잡아 온 국체 개념은 유교적 충효 관념을 바탕으로 국왕을 아버지처럼 섬기라는 매우 수구적인 논리였는데, 실제 왕정복고를 단행한 메이지 유신에 힘입어 공식적 국가이데올로기로 자리 잡는다.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론의 개략’에서 국체를 국가의 일체성을 대변하는 개념으로 정의한 바 있고, 도쿄제국대 법학 교수 가토 히로유키는 외래 제도 도입에 따른 정부 형태 변화와는 대별되는 영원불변하고 유일무이한 일본의 국체에 대해 말했다. 이미 대한제국 시기부터 유치형 등 일본 유학파 법학자들에 의해 수입된 국체론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이르러 본산지보다 훨씬 극렬한 묻지마식 국가제일주의 형태로 활용됐는데, 아직도 많이들 암기하고 있는 ‘국민교육헌장’이 그보다 거의 한 세기 전에 황국사관을 통한 ‘국체의 정화’를 표방했던 일제의 ‘교육에 관한 칙어’와 많이 닮았다는 것은 참으로 씁쓸한 흑역사이다.
이제 우리는 이 허망한 이데올로기에서 탈피할 때도 되었건만, 여전히 기성세대의 일부는 국익 수호만이 참된 애국이라고 믿고 있다. 분명히 국익은 존재한다. 국제질서에는 늘 양육강식이 횡행하고 약소국에는 비참함만이 주어진다. 만약 자국의 영공을 침범하는데 구경만 하는 국가라면 아예 존립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밖으로 향한 폭력이 필히 안으로도 향하게 된다는 데 있다.
민주국가란 안으로 향하는 국가의 폭력성을 연대하는 시민의 힘으로 막아내고 그 과정에서 합의해낸 보편적 공익을 일방적인 국익 위에 세운 국가다. 정파마다 의견이 다르더라도 그 다름을 인정받으려면 민주적 기본질서를 함께 수호해야 마땅하다. 이를 뒤집어 다시금 국익을 공익 위에 세우려는 노력을 ‘애국’이라 칭한다면 그것은 자랑스러운 우리 대한민국에 대한 반역으로 볼 수밖에 없다.
부산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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