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소싯적에 한번은 철학에 도전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시작했어도 ‘선험적(先驗的)’이니 ‘형이상학(形而上學)’이니 하는 낯설은 용어에 짓눌려 쉽게 진도가 안 나가거나 중도에 포기해 버린 기억이 있을 것이다. 철학의 난해함을 이해하기 위해 도전했지만 결국은 그 용어의 난해함 때문에 퇴각해야 했으니.
법학을 배우면서 ‘위법성(違法性) 조각(阻却)’이나 ‘개전(改悛)의 정(情)’과 같은 법률 용어를 외우기 위해 씨름했던 기억도 새롭다. 당시에는 어려운 법률용어를 섭렵하는 것이 마치 법학의 정수를 맛보는 것인 양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금융계 역시 한자어(漢字語)나 외국어 범람으로 용어가 어려운 대표적인 분야 중 하나다. 그 의미는 정확히 몰라도 ‘보호예수(保護預受)’ ‘롤오버(role over)’ 또는 최근에는 KIKO(Knock In Knock Out)라는 용어를 보거나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금융이나 법률 용어가 어려운 까닭은 무엇일까. 법제처의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 백서’의 발간 배경이 좋은 참조가 된다. 즉, 오랜 한자 문화의 영향과 일제강점기 일본법 도입이라는 역사적 배경 때문에 우리 법령은 쉽고 우수한 한글 대신 어려운 한자어와 어색한 일본식 표현에 물들었다. 이는 법령 문장을 국민의 일상 언어생활과 동떨어진 것으로 만들었다. 국민도 법령을 어렵고 난해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입법자들도 익숙한 한자어나 외래어를 사용한 문장을 법률에 관행적으로 사용해 왔다. 다시 말해 우리의 언어감각과는 맞지 않는 용어를 만들어 사용하다 보니 어렵게 된 것이다.
다른 분야도 아니고 금융 용어가 어려운 것은 심각한 문제를 가져온다. 철학이나 과학 분야는 조금 양보해서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살아가는 데 크게 지장은 없다. 반면 금융소비자들은 일상적으로 접하는 금융 상품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최근의 파생결합증권 불완전판매 문제도 따지고 보면 용어의 문제로 볼 수 있다. 투자설명서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이해하기 쉬운 단어로 쓰였다면 금융소비자가 투자 위험에 대해 조금 더 경각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단어와 문장으로 구성된 탓에 투자자들은 금융회사의 일반적인 설명을 믿고 의존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금융상품에 가입하면서 ‘금융상품에 대한 내용과 그 위험에 대한 설명을 잘 듣고 이해하였었음’ 란에 서명은 했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정책당국은 그동안 꾸준히 우리 일상생활과 직접 관련된 금융·법률용어의 순화를 위해 노력해 왔다. 금융위원회 등은 2000년대 초부터 금융약관 등에 사용하는 용어를 알기 쉽도록 정비해 왔다. 앞에서 예시한 ‘보호예수’는 ‘별도보관’으로, ‘롤오버’는 ‘만기연장’으로 대체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법제처도 2006년부터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 사업’을 통해 법령 중 한자어나 일본어 표현을 쉬운 우리말로 바꾸고, 복잡하고 어문규정에 어긋나는 문장을 간결하고 올바르게 정비해 오고 있다.
저금리 고령화 추세로 그 어느 때보다도 재산의 증식·관리 수단으로 금융상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금융상품 가입자는 과거에는 금융투자자로 불렸지만 이제는 금융소비자로 불리며, 또한 금융소비자 보호기구 설립이 추진되는 등 권리 보호도 강화되고 있다. 금융산업은 신뢰를 먹고산다고 할 만큼 일반 국민의 신뢰가 중요하다. 신뢰를 잃으면 소비자가 떠난다. 실제로 지난해 하반기 은행에서 판매된 사모펀드 상품 투자자가 37% 정도 줄어들었다. 대규모 투자손실을 가져온 파생결합펀드(DLF) 사태와 펀드 환매가 중단된 라임자산운용 사태를 계기로 사모펀드에 대한 신뢰 추락과 은행의 불완전판매 이슈가 부각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금융산업이 신뢰를 다시 얻기 위해서는 알기 쉬운 용어를, 속임이 없이 정직하게 사용해야 한다. 이는 권리관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금융소비자의 권리 보호로도 연결되는 것이다. 법률은 판사보다도 국민이 더 필요로 하는 것이고, 경전은 종교지도자보다도 신자가 더 필요로 하는 법이다. 그래서 독일의 법학자 예링(Jhering)은 ‘입법자는 철학자처럼 생각하고, 농부처럼 말해야 한다’고 했다. 종교개혁가 루터(Ruther)는 ‘고향의 어머니, 길거리 아이들, 시장 평민들의 언어’로 알기 쉬운 성경을 만들고자 했다.
흔히 누가 잘난 체 어려운 말을 사용하면 ‘공자님 앞에서 문자 쓴다’고 한다. 금융소비자인 일반 대중에게 문자쓸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간 꾸준히 개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투자설명서, 펀드약관, 보험약관 등은 아직도 국민에게 어렵게 느껴진다. 금융소비자인 투자자 보호, 쉬운 용어를 사용하는 노력으로부터 시작해보자.
한국예탁결제원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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