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대는 끝났다. 이런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다는 게 너무나도 부러웠다. 그것도 인생 정점에서.

지난달 초였다. 그날은 이 말이 쑥 들어왔다. “제 조국에서 저의 축구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한다.” 박항서 베트남 축구 대표팀 감독은 한국 축구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이렇게 정의했다. ‘한국 대표팀을 맡을 의향이 있느냐’는 언론 인터뷰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한국에는 저보다 젊고 유능한 사람이 많다”는 말도 했다.

왜 그날 그말에 ‘필’을 받은 걸까.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이 아름다웠기 때문일까. 하지만 때는 아니었다. 인터뷰 당시 축구 감독으로서 그의 주가는 최고였다. 베트남 축구를 60년 만에 동남아시아 최강자로 올려놓은 그다. 그의 인생도 정상에 섰다. 한국 대표팀 감독 정도는 욕심을 좀 낼 만도 하지 않나. 축구인이라면 꿈꾸는 영광된 자리다. 자격도 충분해 보인다. 베트남에서 이룬 성과를 바탕으로 도전해 볼 만도 하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시대가 아니라고 했다. 한국 축구 풍토와 자기가 서야 할 위치를 잘 알기에 한 말일 수도 있다. 그는 말 많고 탈 많은 한국 축구계의 비주류라고 한다. 욕심낸다고 될 일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려놓는다는 게 쉽지 않다. 대개 사람은 밑을 본 뒤 후회하고 그만둔다. 미래를 알 수 없기에, 중간에서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세상인심은 싸워서 이긴 자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보낸다.

그래서 박 감독의 선 긋기에 마음이 더 동했는지 모른다. 그렇다. 마침이 항상 끝은 아니다. 때로는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흔히 비웠기에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다고 하지 않나. 마음먹기 나름이다. 그런 이치였을까. 박 감독은 한국 축구에서 끝낸 그의 시대를 베트남에서 새롭게 열었다. 자기에게 맞는 공간이 따로 있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누워야 한다. 그에게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이면 족했던 것 같다.

영웅은 그렇게 탄생하는 것이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하지 않나. 박 감독이 취임할 때 베트남 축구는 추락할 대로 추락한 상황이었다. 베트남 축구를 구할 영웅의 탄생을 갈구하던 때였다. 물론 시대적 여건만 바닥이라고 영웅이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리더십과 맞아떨어져야 한다. 선택은 리더가 하는 게 아니다. 조직원의 몫이다. 그 시절 베트남은 박 감독을 선택했다. 그렇게 탄생한 게 ‘파파 리더십’이다. 그는 키 작은 베트남 선수의 비애를 잘 알기에 극복할 수 있는 축구 스타일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리더십은 위기 때 빛나는 법. 베트남 축구는 지난 17일 북한에 1-2로 패하면서 첫 올림픽 출전이 무산됐다. 그가 베트남에서 처한 첫 위기다. 하지만 그는 조직의 수준을 탓하지 않았다. 자책골로 패배의 빌미를 제공한 골키퍼를 감쌌다. “성장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대신 좋지 않은 결과는 감독 책임으로 돌렸다. “선수들은 최선을 다해 뛰어줬고, 감독의 부족함이라 생각하고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조직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건 리더의 자질이란 이야기다. 또다시 ‘파파 리더십’이 빛나는 순간이다.

리더십은 그만큼 중요하다. 세상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닌가. 같은 조건이라도 사람 하기 나름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불확실성 시대에는 새로운 리더십이 더욱더 기다려지는 이유다. 메시아 같은 초인(超人)의 출현을 기다린다.

너무 나갔나. 실현 가능성이 크지 않은 질문에, 의례적인 겸양의 뜻이 담긴 대답을, 그냥 좀 멋있게 한 것일 수도 있는데. 하지만 요즘 우리 사회의 화두가 세대교체이기에 의미가 부풀려 다가왔을 수도 있다. 21대 총선이 2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영향이 크다. 실제 물갈이 요구가 거세다. 386세대가 주요 타깃이기도 하다. 여야 모두 국회의원 불출마 선언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조직은 보통 그렇다. 조직을 위해 떠나야 할 사람은 남고, 남아야 할 사람은 떠난다. 얼마 전 부산의 한 재선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했을 때 이런 말을 많이 했다. 그렇기에 바꾼다고 무조건 다 좋은 건 아니다. 남는 자의 명분이 더 중요하다. 그들의 몫인 변화와 쇄신을 보여줘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요즘 여야의 인재 영입전도 아쉽다. 일회성 이미지 정치의 재연에 가깝다. 단물이 다 빨리면 버리는 추잉껌이라는 비아냥이 나온다. 리더를 키워 사용하는 시스템이 없어 빚어진 현상이다.

그래서 새롭게 맞이할 시대의 리더십을 되짚어보려 한다. 시대정신을 다시 확인해야겠다. 소수가 지배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은 바로잡아야 하기에. 격차 해소라는 사회 안전망을 만드는 리더십이 절실하다. 그런 리더십은 하늘이 그냥 내려주지 않는다. 조직과 조직원이 키우고 선택하는 것이다. 이번 총선이 그런 장이었으면 한다.

논설위원 sbjung @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