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도 더 지난 이야기다. 충청도에 있는 한 종교시설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날은 종교적으로 의미 있는 날이어서 신도와 관광객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질서 유지를 위한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런 북새통에 흘러나오는 안내 방송에 귀가 번쩍 띄었다. 그곳에서 나쁜 짓을 하면 화를 입는다는 당부의 말이었다. 실제 소매치기를 한 뒤 건물을 나서다가 넘어지는 일이 종종 있다고 시설 관계자는 강조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곳의 질서 유지는 인파를 고려하면 나름 잘 지켜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람의 마음은 그런 것 같다. 적어도 종교시설에서만큼은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려고 한다. 부정 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중요한 일에 앞서 기도를 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게다. 자기 몸 하나 화를 입지 않으려고 기도하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 하는 착한 행위에 해를 입히면 어찌 되겠는가. 벌은 곱으로 받을 것이다. 지난해 연말 얼굴 없는 천사의 성금 6000여만 원이 도난됐다는 뉴스를 접하고는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세상에 가져갈 것이 따로 있지.” 세밑 팍팍한 세상인심을 탓하기도 했다.

얼굴 없는 천사는 전라북도 전주시의 노송동 주민센터에 20년째 기부를 한 신원 미상의 인물을 말한다. 그는 매년 ‘불쌍한 사람 도와달라’는 메모와 돼지저금통을 특정한 장소에 둔 뒤 주민센터 측에 전화를 걸어 알려주고는 사라진다. 이 때문에 이름 나이 얼굴 직업 등이 알려져 있지 않다. 전화 목소리를 통해 추정되는 나이대는 30대에서부터 60대까지 다양하다. 따라서 한 가족이 돌아가며 선행을 한다는 추측도 있다. 그렇게 기부한 돈은 총 6억7000여만 원이란다. 성금은 전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노송동 지역의 소외계층에게 사용됐다.

얼굴 없는 천사는 세상의 큰 화제가 되면서 주인공을 밝히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기부하는 날을 바꾸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후 기부자의 뜻에 따라 과도한 관심을 자제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그래서 생겨난 게 얼굴 없는 천사 기념비, 얼굴 없는 천사의 거리, ‘천사의 날개’ 벽화다. 또 주민 문화공간과 테마존 등이 건립됐다. 모방한 익명 기부도 늘어나 한때 ‘얼굴 없는 천사 신드롬’이 일 정도였다.

다행히 절도 용의자 2명이 체포돼 마무리는 잘 됐다. 잃을 뻔한 기부금도 되찾았다. 무엇보다 세상의 관심 밖으로 다소 멀어졌던 천사의 선행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전화위복이 돼야 할 텐데.

정순백 논설위원 sbj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