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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터치] 돈키호테를 다시 읽다 /김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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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9-12-29 19:14:20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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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를 다시 읽는다. 연말 무력감을 이겨내기 위한 방안이다. 올 한 해도 여느 해처럼 바빴고 마감할 몇 가지 일도 모두 마무리 지었다. 그럼에도 들뜬 연말 분위기와는 달리 까닭 모를 허허로움에 마음이 짓눌린다. 도와줄 사람도 곁에 없으니 상실감이 바닥을 치기 전에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 이상을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용기를 얻고 싶었다.

완역판 두 권이 천팔백 쪽에 가깝다. 우리는 돈키호테를 다 읽지 않아도 모두 안다고 믿는다.

정신 나간 시골 노인이 기사도 책을 탐독하다가 편력 기사가 된 이야기, 로시난테라는 깡마른 말을 타고 놋대야 투구를 쓰고 시종 산초를 데리고 떠난 엉터리 모험담, 거인으로 착각한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무모한 내용들. 이것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돈키호테라는 인물은 과대망상증을 지닌 어리석고 황당무계한 자로 전락하였다.

그 책임은 최초의 번역자 육당 최남선 선생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잡지 ‘청춘’을 통해 돈키호테를 ‘둔기호전기(頓基浩傳奇)’라고 소개하였는데, 풀이하면 ‘아둔한 자의 우스꽝스러운 이야기’가 되니 독자에게 미치광이 영웅담으로 단단히 각인시켜 버린 것이다. 그러니 완역본을 만나기 전까지는 괴괴망측한 기행을 나열한 오락책 쯤으로 당연히 오해를 하게 된다.

내가 생각하는 돈키호테의 가장 큰 매력은 현실을 뛰어넘는 힘이다. 그는 이발사 대야를 황금투구로 보고 물레방아 소리를 유령의 울음으로 들었으며 객줏집을 성으로 생각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고 생각지 못한 것을 생각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 장면을 비웃겠지만 아마도 나 같은 미천한 글쟁이라면 작가 이상으로 상상의 세계를 발견하는 그의 광기가 부러울지도 모른다.

돈키호테의 독서력은 또 어떤가. 중세 기사의 무용담을 읽느라 밤을 새우고 책을 사기 위해 논밭도 모두 팔았으며 심지어 하도 책을 많이 읽어 골수까지 말라 버렸다.

나폴레옹이 전쟁 중에도 책을 놓지 않았다거나 조선 시대 독서광인 이덕무가 눈병이 나도 실눈을 뜨고 독서 삼매경에 들었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어느 누구도 골수가 마를 때까지 책을 읽지는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책을 믿고 자신의 신념을 즉시 실행한다. 불의에 맞서는 일이라면 주저하거나 미루지 않는다. 풍차와 일전을 벌이고 군대로 확신한 양 떼와 싸웠으며 적으로 생각한 포도주 자루를 박살 냈다. 숱한 싸움에서 넘어지고 엎어지고 이빨이 뽑힐지언정 산초에게조차 “친구여, 두려움이란 땅에 묻어라”며 당당히 앞장선다.

멸시와 비난을 견뎌내며 약자를 돌보는 따뜻한 인간애도 품는다. 그러기에 더 나은 세상을 꿈꾸라고 외친 초라하고 왜소한 이 늙은 기인을 응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돈키호테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무엇인가. 풍차 거인이나 사자 무리처럼 강력한 적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꿈을 포기해야만 하는 순간이다.

고향 친구가 가장한 ‘하얀 달의 기사’와의 싸움에서 패함으로써 그는 꿈을 접고 귀향의 약속을 이행하게 된다. 진정한 기사는 약속도 충실히 지켜야 했으므로. 집으로 돌아온 돈키호테는 열병을 얻고 불면의 밤을 보내다 우울증에 빠져 숨을 거두고 만다. ‘미쳐서 살고, 정신 차려 죽는다’라는 그의 묘비명 글귀를 읽다 보면 가장 웃긴 희극이 가장 슬픈 비극임을 절감케 된다.

돈키호테는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자도 돈키호테형 인간이다. 고민만 하다 죽은 햄릿보다 정의를 위해서 목숨 건 돈키호테가 훨씬 낫지 않은가.

감히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감히 닿을 수 없는 별에 이르고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아무리 멀지라도 우직하게 걸어가겠다는 그의 말이 가슴에 박힌다. 이제 사백 살이 된 불멸의 영웅 돈키호테가 머뭇거리다 기회를 놓친 사람들에게 일러준다. 실패하더라도 도전해 봐야 후회가 남지 않는다고.

평론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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