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우리나라 신발산업이 태동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신발산업의 100년 역사에서 부산을 빼놓을 수 없다. 1923년 동구 좌천동에 설립된 일영고무공업사를 시작으로 삼화·보생·태화·동양·대양·진양을 포함해 ‘신발’을 대표하는 기업 대부분이 부산에서 태동했다. 1980년대 초반까지 부산의 신발산업 고용인구는 5만 명이 넘었다. 국제상사 등 종업원 1만 명 이상인 신발회사도 4곳이나 됐다.

1950년 한국전쟁 피란민이 대거 유입되면서 부산은 노동집약적인 신발산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미국 스포츠 의류 브랜드 나이키를 시작으로 외국 바이어도 속속 부산을 찾으면서 1970,1980년대까지 부산은 세계 최대의 운동화 생산지로 널리 이름을 알렸다. 당시 유행하던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은 운동화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획기적인 시스템으로 주목받았다. 단일 품목으로 40억 달러를 수출하는 등 대표 효자산업이었던 신발산업은 1990년 43억 달러를 정점으로 급격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제조 원가의 30%에 달하는 인건비와 불안정한 주문에 따른 수출 부진이 원인이었다.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외국 유명 브랜드의 주문자 상표 부착 방식(OEM)에 전체 수출의 95%를 의존하면서 자생력을 갖출 기회도 놓쳤다. 내로라하던 기업이 줄줄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사양산업으로 외면받았던 신발산업이 최근 부활의 날개를 펴고 있다. 고부가가치산업으로 탈바꿈하려는 기업들의 노력과 정책적 지원이 빛을 발하는 중이다. 정보통신기술(ICT)을 접목한 공정 자동화로 제조 비용을 효율화한 데 이어 첨단 신소재로 무장한 기능성 제품이 성공하면서 판로가 해외로 넓어졌다. 연구개발 인력에 대한 투자도 활발하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2009년 3억 달러 후반까지 떨어졌던 신발산업 수출액은 지난해 5억 달러를 회복했다.

은행산업은 어떨까.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은행이 설립된 지 120년이 지난 지금, 은행산업도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ICT의 융합으로 개별산업의 고유영역 간 경계가 사라지고 금융(finance)과 기술(technology)을 결합한 핀테크(fintech) 기업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중국의 알리바바와 같은 ICT기업은 독자적인 기술을 바탕으로 차별화된 금융서비스를 만들어내면서 역으로 ‘테크핀(techfin)’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24년 전 “금융은 필요하지만 은행은 아니다”고 했던 빌 게이츠의 말이 더욱 주목받는 이유다.

금융 소비자 보호를 강조해왔던 금융당국도 금융의 새 판을 짜려고 시도 중이다. 핀테크 활성화를 가로막는 낡은 규제를 손질하고 과거 은행이 독점했던 결제 기능과 고객 데이터를 다른 금융기관과 공유할 수 있도록 오픈뱅킹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 현재 10개 시중은행이 시범실시 중인 오픈뱅킹에 이달 중으로 나머지 은행과 핀테크 기업까지 참여하면 은행과 은행, 은행과 핀테크 기업, 핀테크 기업과 핀테크 기업 간의 격돌은 피할 수 없다.

디지털 세계에서 은행 창구를 이용하던 고객(customer)은 이제 앱을 사용하는 유저(user)로 바뀌었다. 유저를 똑똑하게 만드는 금융서비스도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 금융의 언택트(untact)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은행이 디지털 전환에 사활을 거는 이유다.

이제 고객은 언제 어디서든 이용할 수 있는 편리하고 효율적인 금융서비스를 원한다. 자신이 허락한 데이터를 분석하여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를 향상시킬 수 있는 최적화된 금융 혜택을 기대한다. 산업혁명에서 석탄이나 석유가 중요했다면 4차 산업혁명시대에는 ‘데이터’가 원유이자 가치의 원천이다. 이를 다각도로 분석해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혁식적인 금융과 서비스를 구현할 수 있는지가 은행산업의 성패를 가를 것이다.

‘혁신은 사회과학과 비즈니스, 기술의 교집합에서 나온다’는 디자인싱킹의 기본 원리를 다시금 생각해본다. 혁신은 인간이 가치를 느낄 수 있어야 하며, 이를 가시화하기 위해 기술이 필요하고, 이러한 혁신이 지속되기 위해 비즈니스 모델을 갖춰야 한다는 것인데,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더라도 반드시 고객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이것이 필자가 임직원들에게 강조하는 고객중심경영의 출발점이다.

부산 신발산업의 부흥기를 경험했던 이들은 ‘인간이 신발을 신고 다니는 한, 신발사업은 망하지 않는다’는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고 한다. 시장을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이 보여주는 것처럼, 어쩌면 사양산업이 아니라 사양기업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일이든, 급격한 환경 변화에 얼마나 기민하게 대응하느냐가 기업의 생존을 좌우할 것이다. 금융당국, 은행, 핀테크 기업이 써나갈 디지털 금융의 역사적인 페이지가 궁금해진다.

부산은행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