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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터치] 가을과 겨울 사이 /김나현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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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9-12-08 19:56:05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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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가 유독 앙상해 보이는 때다. 겨울 들머리엔 흘려보낸 한 해 시간 같은 은행잎이 소슬바람에도 사락대며 구른다. 말간 은행나무엔 12월처럼 남은 색 바랜 잎이 꿋꿋이 매달려 있다.

불볕더위의 고비를 연거푸 넘으며 지칠 즈음 절기가 바뀌고, 단풍에 취하는 낭만도 잠시뿐. 한 해가 다 이울었다는 서글픔이 달력 속 올해 남은 날짜를 헤아리게 한다. 이럴 때 황금빛 자존감을 바래지 않은 채로 겨울을 마중 나가 맞이하는 게 은행나무가 아닌가 한다.

이 은행잎이 지천으로 깔리면 김장철이 되었다는 뜻. 이때쯤이면 고향에서 김장하러 언제 올 것이냐고 묻는 전화가 온다. 김장할 날에 맞추어 준비할 일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타지에 떨어져 사는 형제간에 날 맞추어 고향 집으로 모인다. 마치 산란하러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연어의 회귀본능처럼, 겨울 연례행사로 김장하러 간다.

평생 땅 일궈온 부모들은 몸을 혹사해 호미 들 기운이 없어도 여전히 부모라는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대처로 나가 사는 자식들 먹을 김장이라도 해결하겠다고 텃밭에다 배추와 무, 고추, 들깨 농사 정도는 기본으로 짓는다. 꼬부랑 허리로 지팡이 짚고 다니며 땅에 고꾸라질 듯 힘겹게 채소를 키워낸다. 그런 손길을 받고 자란 배추가 있기에,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자세로 수확하는 고추가 있기에, 그보다는 내 어머니가 있기에 고향으로 김장하러 가는 것이다.

김장철이 되면 김치냉장고라는 문물이 고마워진다. 예전처럼, 한파로 얼어붙는 한겨울까지 굳이 기다려 김장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농사지은 양념에다 배춧속만 튼실하게 차오르면 김장 준비는 다 된 셈이니 기댈 언덕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여든 중반인 노모는 노동과 퇴행으로 말미암은 허리협착증과 무릎관절염을 신체기능 일부인 듯 달고 산다. 그런 중에 고추 말려 빻아놓고, 마늘 까고, 무 다듬어 채 썰고, 무청을 말려 시래기를 장만한다. 일찌감치 무를 썰어 말린 무말랭이는 양념 아끼지 않고 장아찌를 만들어 장독에 담아둔다. 이런 일도 힘에 부쳐 못 하겠다고, 올해까지만 하고 말겠다고 작년에 한 말을 또 뇐다.

고향에서 이웃하여 사는 작은집에는 다섯 남매 부부가 우르르 와서 한바탕 김장잔치를 치르고 갔다고 한다. 그에 비해 우리는 단출하지만, 서울에서 온 동생네와 읍내에 사는 오빠네, 부산에서 간 나까지 전국에서 다 모인 셈이다. 가장 젊은 축인 남동생이 배추를 쪼개어 절이고 헹구는 일까지, 힘 드는 일을 다 해주어 올해는 한결 수월했다.

지난해에 어머니가 김장 양념에 버무려 마당에서 맛 든 대파 김치도 올해는 직접 재생해보기로 했다. 달짝지근하고 뒷맛이 개운해 입덧 음식으로 제격일 듯 시원한 대파김치는 평생 처음 먹어 봤다. 며칠간 다른 찬을 갖출 필요 없이 이것만으로 밥을 먹었더랬다. 그 맛을 기대하며 가져온 대파를 김장양념에 버무려 베란다에 이틀쯤 두었다. 시골 한데서 삭은 맛에는 어림없지만, 대략 근접한 맛이 나오긴 했다. 다행이다.

은행나무 잎이 완연한 노란색으로 변하는 11월 둘째 주쯤이면 은행 단풍을 보러 경주 통일전으로 달려간다. 통일전 앞 시원하게 뻗은 은행나무 길 앞에서 노란 가로수 사이로 영화 장면처럼 달려오는 자동차를 보고 있노라면 그제야 가을을 본 듯 충만해진다. 가을맞이가 아니라 그렇게 가는 가을을 눈에 담고 배웅한다는 게 맞겠다.

은행 단풍이야 가까이 범어사 설법전 사리탑 옆 노목부터, 부전시립도서관 앞 낙엽축제가 열리는 은행나무 길, 밖으로는 동해남부선 기차가 정차하는 좌천역 철로에 가을 연서 같은 은행잎을 쏟아붓는 몇 그루, 쌍계사 금당을 환히 비추는 우람한 은행나무도 있지만, 어쩐지 경주쯤은 가야 노란 운치를 제대로 누리는 기분이 된다.

집 앞 은행나무 세 그루도 며칠 새 잎을 우수수 떨구었다. 가을과 겨울 사이의 황량함을 달래주는 은행나무. 둥치 주변으로 노란 단풍이 소복이 쌓였다. 스산하지만 김치냉장고도 채웠겠다, 이제 겨울이 와도 되겠다.

수필가·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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