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이야기.

머리를 어깨까지 내려올 정도로 기르다 보니 재밌는 일이 생기곤 합니다. 저는 남자니까 남성화장실에 가는데, 어떤 남자분께서 제가 화장실에 있는 걸 보고 혼란이 왔는지 머뭇거리시다가 좌변기칸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곧이어 들어오시는 다른 한 분도 절 보고 멈칫하시기에 “남자화장실이에요”라고 말씀드리려 했는데, 입과 목이 덜 풀렸는지 얇은 목소리로 “아자화장실이에요”라고 말해버렸습니다. 그러자 그분도 놀라시고 좌변기칸에서도 급하게 옷을 여미는 소리가 나더니 크게 당황한 표정으로 “예?” 하며 문을 벌컥 열고 나오셨습니다.

이런 일이 종종 있다 보니 사람들을 헷갈리지 않게 하는 노하우도 생겼습니다.

먼저 여러분이 장발 남자라고 상상해봅시다. 화장실에 가면 사람들이 여러분을 쳐다보고 헷갈려하기에 남자임을 확신시켜주려고 합니다. 미간을 찌푸리고 광대와 눈가의 근육을 살짝 올려봅니다. 눈은 적당히 크게 유지하고 턱도 약간 내밀어봅니다. 브란도가 연기한 비토 코를레오네 같기도 하고 눈 큰 김구라 씨 같기도 합니다.

이 정도만 해도 헷갈려하는 사람이 많이 줄어듭니다. 참 신기한 게 머리 길이나 표정만으로도 많은 게 달라집니다. 이런 걸 보고 있으면 재밌기도 하고 기분이 묘하기도 하고, 세상살이에 대한 한 가지 교훈을 얻은 것 같기도 하고 어딘지 모르게 씁쓸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

사실 머리를 기른 게 연극 때문이었습니다. 배역에 맞춰 길렀던 걸 연극이 끝나고도 1년을 더 길렀습니다. 그 1년 전, 저희 극예술연구회 공연에서 제가 맡았던 역할은 50대 후반 나이에, 친구의 자식들에게 얹혀살고, 호탕한 듯하지만 눈치 없는, 그렇다고 뭐라 하면 삐지기도 하는, 술 먹고 들어와 실수로 유품도 깨뜨리지만, 실은 치료하던 환자가 세상을 떠나자 착잡한 마음에 오랜만에 술을 마신 것이었던, 늙어가는 게 두렵고 후회스럽지만 체념하고 살아가려는, 사랑하는 것들이 남아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연극을 하면서 느낀 것은, 한 인물을 재현하려면 그 사람에 대해 끊임없이 궁금해하고 알아내고 공감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어떤 머리를 할까,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떤 옷을 입고, 걸음걸이는 어떠할까. 앉은 자세, 건강, 사회적 위치, 가족 관계, 어릴 적 추억, 상처, 신념,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느끼는지 궁금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왜 이런 말과 행동을 하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어찌 보면 사랑과도 비슷한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인물에게 다가가다 보면 공감과 감정 이입 그리고 ‘타인 되기’가 가능해집니다. 다른 사람을 끊임없이 ‘타자화’하는 세상에서 타자화가 아닌 ‘타인 되기’를 할 수 있다는 것, 그게 연극이 가진 가치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보는 사람들은 어떤 머리를 하고 있나요?

세 번째 이야기.

이제는 다른 일이 바빠 연극을 직접 하지는 못하지만 공연은 종종 보러 다닙니다. 얼마 전 부산극회연합 연극제에 다녀왔습니다. 부산극회연합이란 부산의 7개 대학 극회(경성대 동아대 동의대 부경대 부산대 부산교대 부산외대)가 모여 만든 단체로 ‘연결 연극제’를 시작으로 올해는 ‘단편 연극제’를 열었습니다. 이번 연극제에서는 실직한 아버지, 사회 구성과 그 속의 역할, 젊은이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동의대, 부산대, 부산외대 극회가 선보였습니다.

준비한 학생들에게도 값진 경험이었겠지만 이들이 바라본 타인의 삶을 관객으로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게 기뻤습니다. 사실 연극동아리는 IMF사태 이후 인기가 시들해졌다가(동아대 극회는 폐부되기도 했습니다) 다시 살아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비전공 학생들이 하는 거라 미흡한 점이 생기긴 합니다. 그럼에도 이 지역 대학생들이 세상을 들여다보고 이를 주변과 나누고자 하니, 이들이 바라본 타인 삶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도록, 시민 여러분께서도 관객으로 동참하고 응원해주시는 건 어떨까 권해봅니다.

동아대 극예술연구회 회원·의학과 1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