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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터치] 만화방 라면…‘사라지는 것들’에 경배를 /배길남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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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9-10-20 19:12:48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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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이었다. 일주일 넘도록 휴일이 없던 소설가 길남 씨는 이날만큼은 어느 정도 여유가 주어져 마음이 편안했다. 강의가 있는 저녁을 제외하고 낮 시간만큼은 온전히 자신에게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딸을 유치원에 데려다주면서도 저녁까지의 시간을 어떻게 나누어야 할지 행복한 고민 속에 빠져야 했다.

먼저 밀린 업무를 해결하려는 심산에 전화를 들었다. 그런데 그의 인상이 구겨졌다. 가려했던 사무실이 워크숍으로 휴무여서 닫혔단 소식.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평일 오전이다 보니 마땅히 연락을 취할 이도 없다. 항상 여유를 갈구하고 자기 시간을 추구하던 사람이었지만 정작 자유가 주어지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는 자신이 한심했다. 꼬르륵! 길남 씨는 갑자기 허기를 느꼈다. 짬뽕? 뼈다귀탕? 두루치기 백반? 밀면? 일본식 라멘? 돈가스? 하지만 점심을 먹기에 시간이 너무 일렀다. 소설가의 머릿속에 만화방 라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랬다! 이런 눅눅함 속에서 잠시나마 소파에 몸을 맡기고 만화책을 뒤적거리며 먹는 라면 맛은 천하일품일 터이다. 그런데 가만있어보자. 요즘 만화카페란 곳이 몇 곳 있어도 영 맘에 들지 않고, 그가 그리는 정통 만화방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길남 씨는 20분간 근처 대학가를 돌아다니다 심각한 우울함에 빠지고 말았다. 기억으로 더듬어 갔던 만화방 두 곳이 폐업한 뒤였기 때문이다. ‘단행본 1권 100원 판매’라는 초라한 글귀가 빗발에 젖어 그의 우울함을 더욱 진하게 만들었으니…. 그는 갑자기 자신의 등단작 ‘사라지는 것들’이란 소설을 떠올렸다. 부산을 철통같이 지키던 동보서적과 문우당서점의 폐업을 소재로 썼던 소설이었다. 변화는 서릿발보다 더 매섭고 빠를 뿐이다. ‘사라지는 것들’은 여전히 주변에 산재하고 있다.

바람까지 몰아치고 있었다. 신과 온몸이 젖어 갔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길남 씨는 무슨 사명이라도 생긴 것 같았다. 위치찾기 앱까지 동원한 그는 굶주린 이리처럼 만화방을 탐색하고 나섰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비에 젖은 그의 눈앞에 드디어 정통 지하 만화방이 ‘왔구나! 기다리고 있었어’하고 그에게 소리치듯 모습을 드러냈다. 떨리는 마음으로 계단을 내려서는데 희미한 형광등 불빛 사이로 ‘내가 여기 오는 것은 시간이 남아서가 아니라… 이만한 만남의 장소도 없거니와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이다’라는 주문 같은 문구가 뒤를 따라왔다.

문을 열자 손님이 아무도 없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오래된 책 냄새가 그의 코를 자극하는데 입안에 침이 가득 고여 가는 것이다. 청소하는 분이 계신데 살집이 좀 있는 풍채에 덥수룩한 머리를 하고서 뿔테 안경을 써 인상적이다. 마치 이마에 ‘만화방 사장 또는 알바’라고 적어놓은 듯하다. 길남 씨는 더듬거리며 “배, 배가본드가 어디에 있죠”라고 물었다. 그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저기, 114번으로 가세요”라고 답했다. 114번 칸에 선 소설가는 몇 년간 보다 말다를 거듭한 만화책을 찾았다. 32권과 33권은 분명 본 것 같은데 아무리 확인해도 처음 보는 것 같다. 소설가는 만화 두 권을 뽑아 카운터에 놓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라면 되, 됩니까…?”

“만화책 두 권이랑 3800원이요.”

그래, 이 맛이야! 라면을 먹지도 않았는데 길남 씨는 이미 감동하여 입으로는 웃음이, 눈으로는 눈물이 새어 나왔다. 이제 드디어 시작이다.

소파 한쪽에 가방과 겉옷을 벗어놓고 테이블에 커피 한 잔과 과자 한 봉, 그리고 만화책을 올려놓았다. 기호에 따라 담배도 함께 배치하고는 만화를 천천히 감상하며 라면을 기다렸다. 10분쯤 지났을까? 묘한 종이 냄새 사이로 라면 향이 감지되고 사장님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쟁반 위에는 계란이 적당히 풀린 라면과 공깃밥 한 그릇, 물 컵 하나, 그리고 김치는 없지만 노란 단무지가 그 자리를 대했다.

아아, ‘사라지는 것들’에게 경배를…!

만화 속에선 두 명의 검객이 칼을 맞부딪쳤다. 생과 사가 오고 가는 순간, 검투를 눈에 담던 소설가가 이윽고 젓가락을 들었고…, 그의 입가에서 터지는 소리. 후루룩!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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