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어법에서 ‘정치적’이라는 말은 대개 순수하지 못하고 헛된 욕심을 부린다는 뜻으로 쓰인다. 늘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속셈은 따로 있어서 음험하고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을 정치적이라고 일컫는다. 이에 반해 비정치적인 사람은 자신의 본업에 충실하고 오로지 자신과 관계된 일에만 정당한 의견을 피력하므로 일부러 거짓 명분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 심지어 직업정치인의 ‘정무적’ 판단도 늘 의심스러운 것으로 간주된다.

학생과 노동자, 공무원의 의견 표명은 정파적이어서는 안 되며 거리의 시위도 순수한 시민의 목소리를 표출해야지 특정 정당의 정략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 민감한 정치 · 사회적 이슈도 뚜렷한 대안 없이 섣불리 제기됨으로써 정쟁의 도구로 전락해서는 곤란하다. 한마디로 각자가 사회생활 속에서 겪게 되는 직접적인 고충과 상관없는 보편적인 주제에 대해서는 감히 떠들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오랜 군사독재가 우리 사회에 남긴 불미스러운 유산임에 틀림없다.

정치적이라는 지목으로 단번에 권위가 실추되는 직업군으로 교직 종사자들을 꼽을 수 있다. 교단에 서는 자는 정치적 발언을 삼가야 할 뿐 아니라 아예 정치와는 담을 쌓고 ‘순수하게’ 교육과 학문에만 정진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통념이다.

유력 정치인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소위 폴리페서는 말할 나위도 없고 연구자의 학문적 신념을 공공적 차원으로 구현하려는 노력마저도 입신양명의 방편으로 폄훼된다. 벌써 두 달 이상 공론을 달구고 있는 교수출신 전 법무부 장관의 정치적 이력도 희대의 사기극 내지는 위선으로 깎아내리고 싶어 한다.

대체 왜들 그렇게 정치를 혐오하는 걸까? 아니면 오히려 정반대로 성인군자만이 정치할 자격이 있다는 건가? 정치인들이 혐오스럽다고 해서 정치 자체를 포기해버린다면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사회에 만연된 정치혐오증에 있어서는 심지어 직업정치인도 예외가 아니다. 여야 막론하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소위 ‘민생’이란 한국적 용어가 그것을 입증한다. 정치인 본연의 과제가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다는 논리는 그 문제를 넘어선 공공적 사안을 논하는 것이 쓸데없거나 부차적이라는 함의를 띤다. 먹고사는 문제가 노동과 인권, 사회적 공정성, 복지와 환경 등 공공적 사안과 무관하다고 보는 것도 이상하지만, 설령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더라도 오히려 그처럼 우리와 후손의 삶을 살찌울 고차원 가치를 수호하는 일이야말로 정치인의 사명이 아닌가? 먹고사는 문제는 평범한 시민이 책임지면 된다.

왜 우리 사회는 이념의 추구를 죄악시하는가? 혹여 주변을 돌보지 않고 제 욕심만 챙겨온 우리 자신의 부끄러운 민낯을 감추고 싶은 것은 아닌지? 어떻게 한 국가와 사회가 더 나은 가치에 대한 갈망 없이 존속될 수 있는가? 물론 현실은 이념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이념마저도 현실에 관철시키려면 외교적 언사와 눈속임, 거래와 타협, 혹은 적대와 위협 등 온갖 정략적 수단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지만 정략은 정치의 전부가 아니다. 정치는 고상하지도 저열하지도 않다. 단순히 먹고사는 차원으로 만족할 수 없고 늘 불가능한 꿈을 꾸며, 전혀 책임질 수 없는 미래를 향해 투자하고 부질없는 승리를 위해 과도하게 경쟁하는 인간이라는 종에게 부여된 고유한 숙명이 바로 정치다. 인간은 신처럼 무위의 경지에 이르지도, 동물처럼 생존본능에 묶여있지도 않고 늘 주어진 현실을 초과하는 과잉된 삶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서로 사랑하고 싸우면서 정치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은 아름답고도 어리석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공론을 지배하고 있는 정치적 중립의 원칙이란 과연 어떻게 평가해야 옳을까? 본래 정치적 중립이란 공평무사함을 말하는 것이지 정파들 사이에서 기계적 중립을 지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한 사회의 미래가 걸려 있는 공공적 사안에 대해서 비정치적임은 자랑이 아니다.

교원만큼이나 언론도 충분히 정치적이어야 한다. 특정한 가치에 연루되지 않는 사실 보도란 그 자체가 편파적이라 그런 주장을 하는 언론사 말고는 어느 독자도 그것을 공정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당파성을 결여한 언론이란 19세기 독일 역사가 드로이젠의 표현을 빌리면 ‘환관’의 역할과 다를 바 없다. 언론을 포함하여 우리 사회구성원 모두는 미래를 함께 만들어갈 동반자이다. 우리는 각자 서로 다른 이념의 정당성을 놓고 공정하게 경쟁해야 옳다. 현 시국에 대한 정치적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따라서 때 아닌 비정치적 태도는 거짓과 위선으로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부산교대 사회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