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1. 고려 후기 찬성사(정이품 관직)를 지낸 정을보 (1285~1355)는 자작시 ‘진주촉석루’에서 “황학루가 저 한때 이름을 떨친 건 최공이 일 좋아해 시를 남긴 덕분…”(하강진, 역주해 역대 촉석루 대집성, 경진출판)이라고 적었다. 여기서 ‘황학루(黃鶴樓)’란 지금의 중국 우한시에 위치한 당(唐)대의 유명한 누각을 가리킨다. 이 누각이 산 넘고 바다 건너 고려에까지 그 명성을 떨쳤다는 것이 흥미롭다. 황학루를 직접 보았을 리 만무한 정을보이지만, 이를 언급한 것은 필시 ‘최공’(8세기 유명시인 최호)의 글을 많이 읽은 덕분일 터이다. 직접 보지 못하고 오직 글로 접한 황학루가 정을보의 머릿속에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촉석루에 비유한 것을 보면 정을보가 생을 통해 축적해온 지식과 경험이 상상력의 기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례2. 중국 최고의 공상과학(SF) 소설가 류츠신(劉慈欣)은 ‘삼체(三體)’라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 소설은 지구인은 엄두도 못 낼 최첨단 과학기술로 무장한 외계인들이 우주선 1000대를 거느리고 400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지구로 항해한다는 가공할 만한 스케일을 자랑한다. SF소설인데도 스토리가 탄탄한 것은 역사, 천문학, 물리학, 뇌과학, 정치학, 사회학, 철학 등 다양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김대식,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민음사). 이를 보면 상상력의 스케일이란 지식의 깊이 및 폭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사례3. 메이지 초 일본은 서양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취지에서 이와쿠라(岩倉) 사절단을 1년9개월21일 동안 12개 국에 파견했다. 이들이 당시 가지고 나간 돈은 미화 50만 달러인데 지금 물가로 환산하면 당시 국가예산의 1.5%에 해당하는 약 100억 엔에 이르는 엄청난 금액이다. 이 돈으로 각 도시를 방문하는 동안 최고급 호텔에 머물렀고, 서양식 턱시도를 사서 입었다고 한다. 우리네 상식으로는 국가예산을 낭비했다고 비판 받을 법한데, 이들의 생각은 달랐다. 이왕 비싼 돈을 들여 해외에 나간 이상 최고를 배워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최고위층을 만나 교류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경비를 아끼느라 누추한 옷에 허름한 호텔에 기숙한다면 최고위층이 만나줄 리 만무하리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배우고 경험한 것이 상상력과 연계되어 일본 근대화의 기초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상상력이란 열린 마음과 적극적으로 배우려는 자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사례4. 조선 말 강화도 조약 후 예조참의 김기수는 75명의 수신사 일행을 이끌고 일본으로 갔다. 그런데 그들은 상투를 틀고 갓을 쓴 채 일본 도쿄에 도착했다. 여관에서 좀체 나오려고 하지 않는 김기수에게 일본 관리가 바깥구경 할 것을 종용하자 “기이하고 과도하게 기교를 부린 서양 야만인들의 과학기술을 배우려는 일본을 경멸한다”라고 맞받았다(함재봉, 한국사람 만들기 2, 아산서원). 일본까지 갔음에도 도무지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마음조차 없었으니 상상력이 자극될 리 없었을 것이다.
창의력이 중요해진 요즘 시대에 가장 필요한 덕목은 상상력이다. 앞선 4편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대개의 경우 상상력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이나 습득한 지식의 정도에 따라 그 스케일과 한계가 정해진다.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사람의 상상력은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것보다 훨씬 뛰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축적한 경험이나 지식이 어느 순간부터 고정관념이나 아집으로 굳어져 지적 교만에 빠져 들 경우 상상력이 끼어 들 공간은 사라진다. 김기수가 비록 유학(儒學)적 지식과 조정을 관할했던 경험이 풍부했을지는 몰라도 열린 마음이 없었으니 새로운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으로 이어졌다. 당시 조정을 지배했던 이러한 고정관념은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게 했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요즘 나라밖에서는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와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같은 일개 개인이 그간 국가차원에서만 추진했던 우주개발사업에 뛰어드는 등 상상력 경쟁이 한창이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교육을 위해 미국에는 미네르바대학과 같은 기존 교육방식을 철저히 거부하는 신생 대학이 속속 설립되고 있다. 이들 대학 졸업생은 창의기업의 대명사인 구글, 애플, 아마존 등에 대거 채용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 부응하기 위해 필자가 몸담고 있는 대학에서도 학생들의 상상력 자극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개념의 단과대학 ‘Q College’를 내년 신학기에 선보일 예정이다.
우리의 상상력이 정을보의 ‘황학루’에 머물 것인지, 아니면 1000대의 우주선이 온다는 스케일의 대한민국을 만들 것인지는 전적으로 지금 현재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나에 달려 있다. 열린 마음으로 생각의 지평을 넓혀나가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동서대 총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