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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120여 년 전 ‘헬 조선’의 교훈 /이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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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9-09-15 19:02:34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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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 조선’이란 말이 있다. 노력해도 살기 힘들어 희망이 없는 암울한 사회를 풍자한 말이다. 과연 한국은 희망이 없는 나라일까? 구한말 이 문제를 논한 영국인 여성 여행 작가가 있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 그녀는 영국 왕립지리학회 최초 여성 회원으로 동학농민 운동과 청일전쟁이 일어난 1894년에서 1897년까지 만주, 시베리아 등을 거쳐 조선을 네 차례나 방문한 여장부였다. 그녀는 한반도 각지를 돌며 서민의 삶을 목도했고 고종과 명성황후 그리고 외교사절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이란 역저를 남겼다.

한국에 대한 그녀의 첫인상은 ‘희망 없고 무기력한 존재’였다. 서울의 뒷골목은 오물로 넘쳐 지독한 냄새에 찌들어 있었다. 좁고 굽은 도로는 진흙탕이었고 나지막하게 짚을 덮은 집들은 쓰러질 듯하고 상점들조차 6달러 정도면 가게 내의 물건 전부를 살 정도로 상품은 조악하고 빈약했다. 지배층인 양반에서 중간계층,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일하지 않고 빈둥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한때 조선인을 삶의 희망이 없는 열등 민족처럼 생각했다.

그런 그녀가 시베리아에 사는 조선인 마을을 방문하고는 한국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꾸게 되었다. 시베리아에 이주해 사는 조선인의 부지런함과 윤택함은 그곳의 러시아인이나 다른 민족들보다 돋보였다. 이들은 농지를 넓히고 상점을 열어 무역을 하는 등 새로운 일거리를 만들었다. 한국인의 강인함에 이끌려 그녀는 네 차례나 한국을 방문했다. 그녀가 깊은 관찰 후 내린 결론은 명료했다. ‘자신이 번 것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면’ 한국인은 희망을 갖고 더 열심히 일한다는 것이었다. 낮은 세금과 일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줄이는 것이 활력의 원천이었다.

당시 조선은 지배층의 착취가 심했다. 비숍 여사도 여행 중 양반의 횡포를 목격할 수 있었다. 그녀가 배를 타고 한강을 따라 여행하던 중 양반의 시종이 기와를 서울까지 운반할 배를 징발하려 뱃사공들과 다투고 있었다. 양반은 운송에 어떤 대가도 지불하지 않기 때문에 뱃사공들은 갖은 이유로 발뺌하고 있었다. 많은 백성은 무거운 조세 부담과 수탈에 허덕이고 있었다. 상인이나 농부가 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나면 관리나 양반들은 세금 징수뿐만 아니라 돈을 빌려줄 것을 요구하거나 빚을 갚으라고 독촉했다. 이를 거절하면 죄목을 씌워 투옥시키고 돈을 낼 때까지 곤장을 쳤다. 그러니 누가 열심히 일하겠는가. 그저 먹고살 정도만 일할 뿐….

그녀는 암울한 한국을 벗어나려면 우선, 자신이 번 것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도록 투명한 행정제도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또 공정한 조세부담,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의 지불 그리고 각종 분쟁에 대한 공명정대한 소송제도의 확립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다음으로 한국인은 의존적인 삶을 탈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에는 수많은 건장한 젊은이가 친족에 의존해 살아가는 풍조가 있었다. 이처럼 놀고먹는 많은 식솔을 먹여 살리려면 관직을 둘러싼 권력 싸움이 치열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1896년 ‘독립신문’이 창간돼 대중을 일깨우고 거리도 깨끗해지는 등 조선에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조선에 대한 혐오감은 애정과 관심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조선을 떠나야 하는 그녀에게는 우려가 있었다. 이 국가가 주변 열강의 도전을 과연 잘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서양 문물을 수용하자는 ‘동도서기론’에 앞장섰던 온건 개화파이자 학부대신인 신기선이 1896년 펴낸 ‘유학경위(儒學經緯)’를 읽으며 걱정이 앞섰다. 조선 전통사상의 우수성을 소개한 이 책에는 ‘서양인이 기독교라고 부르는 것은 저속하고, 비천하고 잘못돼 부도덕한 야만인의 관습의 실례이기 때문에 숙고할 가치도 없다’거나 ‘중화의 천자는 얼마나 웅대하고 화려한가! 청국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부유한 나라이다’ 등 서양에 대한 편견과 중국에 대한 편애가 녹아 있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됐지만 지도층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에 갇혀 국제사회의 큰 흐름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니혼대학 상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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