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주간의 일정으로 터키 여행을 다녀왔다. 남한 면적의 8배가 되는 터키는 아시아와 유럽 대륙에 걸쳐 있다. 아나톨리아로 통칭되는 아시아 쪽 영토가 국토의 97%를 차지하고 보스포러스해협, 마르마라해, 다르다넬스해협을 끼고 있는 유럽 쪽 영토는 3%에 불과하다. 이런 지리적 조건 때문에 터키는 고대로부터 동서양 문물이 충돌하는 장소였다. 고대 히타이트로부터 시작하여 알렉산더 대왕의 지배, 동로마 제국, 오스만 제국 등을 거쳐 1923년 터키공화국으로 거듭났다.
보스포러스해협을 끼고 있는 항구 도시 이스탄불은 신구시가지 모두 야트막한 언덕 위에 발달해 있었다. 구시가지의 중심 술탄 아흐메트 지역에는 아이야 소피아, 블루 모스크 등 유명한 명소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신시가지의 중심 탁심 광장은 고급 쇼핑가와 식당가가 즐비했다. 에미네뉘 선착장에서는 신시가지인 카드쾨이, 아시아 지역인 위스크다르행 배들이 연신 출발하고 도착하였다. 활기차고 개방적인 이스탄불의 풍경 속으로 하루 몇 차례씩 모스크에서 울려 퍼지는 ‘아잔’ 소리는 새삼 이곳이 이슬람 국가임을 일깨워주었다.
매혹적인 풍광과 다양한 볼거리 외에도 이스탄불은 내게 단연 터키 소설가 오르한 파묵의 도시였다. 파묵은 16세기 오스만 제국 시절 궁정 화가들 사이에 발생한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내 이름은 빨강’이란 작품으로 200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파묵은 이 소설에서 전통적 평면적인 이슬람 세밀화 기법과 원근법이 도입된 사실적 베네치아 화법이 격돌하는 동서양 문화의 충돌을 다뤘다.
노벨상 수상 이후 파묵은 2008년 ‘순수 박물관’이라는 장편소설을 발표하였다. 1970~90년대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퓌순이라는 여자를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평생 사랑한 케말이라는 한 남성의 이야기이다. 약혼식을 앞둔 상태에서 먼 친척인 퓌순을 만나 사랑에 빠진 케말은 이후 자신의 파혼과 퓌순의 결혼 등 엇갈리는 운명에 놓인다. 그는 8년간 그녀의 집에 드나들며 그녀와 관련 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들고나와 한때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던 장소에 보관한다. 그리고 그녀가 죽은 후 그 물건들을 전시할 ‘순수 박물관’을 세운 후 박물관 꼭대기 층에서 말년을 보낸다.
흥미로운 건 이스탄불 시내에 작가 자신이 만든 ‘순수 박물관’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파묵은 이 소설의 구상 단계에서부터 이미 소설 속 케말이 세운 박물관을 건립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박물관에 어울릴만한 오래된 건물을 구입하였고, 소설을 써나가면서 내용과 관련 있는 다양한 물건을 사 모았다. ‘순수 박물관’은 2012년 4월 드디어 문을 열었다. 소설 속 허구의 세계가 온전히 실제의 세계로 거듭난 것이다.
추쿠르주마 거리에 있는 ‘순수 박물관’을 찾아가던 날 내 손에는 파묵의 책 ‘순수 박물관’ 2권이 들려 있었다. 소설의 말미 책을 읽고 찾아오는 독자는 무료로 박물관 입장을 할 수 있으며 책 속에 특별한 도장을 찍어준다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붉은색을 띤 박물관 입구에서 반신반의의 심정으로 책을 내밀었다. 창구 아가씨가 활짝 웃으며 무료입장권을 건네더니 책 속에 스탬프를 찍어주었다. 나비 문양이었다. 아! 소설 첫 장면 퓌순이 잃어버린 나비 귀걸이 한 짝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박물관에 들어서자 정면 벽을 가득 채운 담배꽁초가 나타났다. 소설 68장에 나오는 4213개의 담배꽁초였다. 퓌순의 집을 드나들던 8년 동안 그녀가 피운 담배꽁초를 케말이 몰래 갖고 와 연도별 날짜별로 정리한 것이었다. 그가 모은 수천 개의 담배꽁초들은 평생 퓌순에게로 향했던 사랑의 시간성을 가시화하고 있었다.
2층에는 소설의 전개 순서에 맞춰 전시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케말이 퓌순을 처음 만나던 날 그녀가 신었던 노란 구두, 그녀의 꽃무늬 원피스뿐만 아니라 소설 속에 등장하는 1970~90년대 이스탄불에서 사용되던 소소한 생활용품들이 빽빽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케말이 말년을 보낸 4층 다락방에는 침대와 벗어놓은 파자마, 퓌순과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세발자전거 등이 놓여 있었다.
실내 곳곳에 ‘순수 박물관’ 책을 가슴에 안은 채 전시물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방문객들이 있었다. 그들도 나처럼 파묵의 책을 읽은 뒤 마치 성지 순례를 하듯 그곳을 방문한 것이다. 책을 통해 상상하였던 허구의 세계가 바로 눈앞에서 구체화·입체화되는 순간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오르한 파묵이라는 작가의 파격적인 상상력과 그에 못지않은 집념이 새로운 예술 공간을 만들어냈다. ‘순수 박물관’은 소설 속 퓌순에 대한 케말의 사랑을 담은 문학적 공간을 넘어서 20세기 후반 이스탄불의 모습을 기억하게 만드는 문화적 공간이었다.
동서대 영어학과 교수·민석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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