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만 해도 무장공비나 간첩 체포 뉴스가 많았다. 압수한 소지품 중 항상 난수표가 있었다. 숫자들이 무작위로 나열돼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자기들끼리는 소통이 돼야 하므로 특정한 비밀 규칙을 따르면 쉽게 해독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른바 암호다.

암호는 전쟁의 산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이 독일군의 암호 패턴을 해독해 잠수함 공격을 막아내었다. 이때 튜링이라는 수학자가 크게 활약했고 암호해독의 원리를 발전시켜 0과 1의 수열을 특정 목적에 맞게 차례로 변경, 처리하는 알고리듬과 계산 기계의 원리를 제안한 것이 오늘날 컴퓨터의 기초원리가 됐다. 튜링은 컴퓨터, 전산학, 인공지능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동성애자로서 박해받다가 독이 든 사과를 깨물고 생을 마감했다.

암호해독을 연구하다가 컴퓨터가 발명되었지만, 암호를 만드는 데에도 컴퓨터가 이용된다. 사실 알고리듬이 시킨 대로만 연산하는 컴퓨터는 원리상 완전한 난수를 만들기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난수와 유사하게 보이는 수열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숫자에 아주 큰 수를 곱하고 아주 큰 수를 더한 후에 다시 아주 큰 수로 나누어서 컴퓨터의 연산 장치에 다 저장되지 못하고 일부 끝자리 숫자들만 남게 되어 처음 숫자와는 아무 연관성 없이 무작위하게 보인다. 이렇게 생성된 숫자에 대해 다시 같은 과정을 반복하면 무작위하게 보이는 숫자들을 연속적으로 얻게 된다. 이들 난수는 완벽하게 무작위하지는 않으므로 유사 난수라고 한다. 오늘날 확률적 변동 요소가 있는 복잡한 시스템을 컴퓨터 시뮬레이션하기 위해서는 대부분 이러한 연산식에 의한 난수 생성기를 이용한다. 난수들이 편향성이나 패턴을 갖게 되면 시뮬레이션 결과가 왜곡된다. 그런데 완전히 무작위한 난수를 만들기는 대단히 어렵다. 편향성이나 패턴을 거의 갖지 않는 수학적 암호생성 연산식을 만들기도 대단히 어렵다. 대부분의 수학적 암호생성기는 일정 횟수만큼 난수를 생성하고 나면 동일한 난수들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많은 어려운 수학 이론을 동원해보았지만 새로운 좋은 난수 발생기를 만들기가 몹시 어렵다.

한편 오늘날 전자상거래, 보안 통신 등에 실용화된 암호체계도 이와 비슷하게 소인수 분해를 통해 난수를 생성한다. 제삼자가 볼 때는 어떤 패턴도 발견하기 힘들지만, 간단한 키가 주어진 허락된 사람은 난수 패턴을 쉽게 풀게 한 것이 암호이다. 슈퍼컴퓨터 등을 이용해도 쉽게 패턴을 찾지 못하도록 최대한 난수화하되 허락된 사람은 쉽게 풀 수 있어야 한다는 모순을 갖고 있다. 한쪽에서는 완벽한 난수를 만들려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난수의 패턴을 알아내려고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는 셈이다. 오늘날 최고의 슈퍼컴퓨터를 이용해도 수천 년 이상 소요되도록 암호 난수 발생기를 설계한다. 그러나 최근 실용화에 근접한 초병렬 연산을 하는 양자컴퓨터는 무작위하게 보이는 데이터로부터 패턴을 찾는 데 아주 유용하여 오늘날의 수학적 암호생성기에 기반한 암호체계를 단숨에 풀 수 있다.

완벽한 난수 발생기는 과연 가능한가? 다양한 복잡한 첨단 과학 및 공학 시뮬레이션에는 완벽하게 무작위한 난수 발생기가 필요하다. 컴퓨터의 수학적 연산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우주에서 대기를 뚫고 지구에 도달하는 우주방사선 입자, 빛을 편광판에 쪼여 투과한 광자, 초미시 세계에서 양자의 불안정하고 예측이 불가능한 상태 변화 등의 자연현상은 거의 완벽하게 무작위하다. 따라서 이들을 물리적으로 탐지하여 난수를 발생하는 장치가 최근에 개발되고 있다. 이렇게 생성된 거의 완벽한 난수는 초정밀 컴퓨터 시뮬레이션뿐 아니라 극도로 엄격한 보안이 요구되는 통신에도 사용할 수 있다. 발생한 난수를 본래 데이터에 더하거나 곱하는 방식으로 섞어 버리면 동일한 난수를 갖지 못한 제삼자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탐구심과 탐욕은 먼 미래에 우주방사선과 양자 현상에도 패턴이나 편향성을 발견하고 예측할지도 모를 일이다.

KAIST 산업 및 시스템 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