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내 인생이었고, 인생이 곧 여행이었다. 우리는 모두 여행자이며, 타인의 신뢰와 환대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여행에서뿐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도 많은 이의 도움 덕분에 굴러간다. 낯선 곳에 도착한 이들을 반기고, 그들이 와 있는 동안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다 가도록 안내하는 것, 그것이 이 지구에 잠깐 머물다 떠나는 여행자들이 서로에게 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일이다”라고 김영하 작가는 ‘여행의 이유’(문학동네, 2019)에서 말하고 있다.

요즘은 책방에 와서 여행에 관한 책을 찾는 이가 적지 않다. 여행지에서 읽을 만한 가벼운 에세이나 소설을 고르는 이들도 있다. 남들 다 가는 휴가철인데, 피서 안 가냐고 내게 묻는 손님도 있다. 나는 문학 서가에 기대어 서서 밤낮으로 책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고 웃으며 대답한다. 언제나 그러는 건 아니다.

며칠 전에는 슬로베니아라는 낯설고 먼 나라에서 살고 있는 강병융 작가가 책방에 왔다. 그는 류블랴나대학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소설가인데, 최근에 출간한 에세이집 ‘도시를 걷는 문장들’(한겨레출판, 2019)을 가지고 행사-책방이듬 ‘제7회 저자와의 만남’-를 하러 방문한 것이다. 유럽의 수많은 도시를 여행하며 느꼈던 감정과 그 어떤 장소에서 읽었던 책에 관한 기록이 가득한 책이었다.

그는 다정하게 마주앉은 독자들을 향해 ‘여행의 행복은 장소가 아닌 내가 만드는 것’임을 강조했다. 객석에서 한 사람이 질문했다. “작가님은 왜 여행을 즐기시나요? 여행의 이유를 알고 싶어요.” 강병융 작가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저는 멈추기 위해서 떠납니다. 일상에서는 멈출 수 없죠. 사람들, 특히 한국 사람들은 그 멈춤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멈춰야 생각할 수 있으며, 멈춰서 생각하는 시간이 있어야 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저는 그 시간들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의도적 멈춤, 적극적인 일상과의 거리 두기, 그것이 바로 제 여행의 이유입니다.”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내겐 역마살이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누군가가 나에게 여기를 벗어나서 바다를 보러 가자고 하면 수영복을 가지러 집으로 뛰어갈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행히 책을 펴들 때마다 내 맘은 파도친다. 소설이나 시가 보여주는 완전히 또 다른 세상을 향해 페이지를 넘기면 골방이든 책방이든 잊어버리고 매혹적인 여행지를 배회하는 기분이 들 때가 많다.

비 내리는 조지아, 요코하마, 온천, 기차역, 타오르는 갈대밭 등지로 우리를 데려간 시인이 얼마 전까지 살아있었다. 폴과 낸시, 치타, 미란다, 프랑스 이모, 판타스틱 로맨틱 소년 소녀들을 소개해주기도 했던 그는 ‘두통 속에서 어느덧 지구를 한 바퀴 빙 돌아 처음으로, 텅 빈 집터로 다시 돌아왔’(‘어린이_행진곡’)다고 했다. 그의 텍스트로 여행하는 일은 의외로 불편하고 끔찍한 경험일 때도 있었다. 두리번두리번하던 그가 지리적으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그의 사후에 알게 되었다.

‘하늘의 뜨거운 꼭지점이 불을 뿜는 정오// 도마뱀은 쓴다 / 찢고 또 쓴다 // (악수하고 싶은데 그댈 만지고 싶은데 내 손은 숲 속에 있어) // 양산을 팽개치며 쓰러지는 저 늙은 여인에게도 / 쇠줄을 끌며 불 속으로 달아나는 개에게도 // 쓴다 꼬리 잘린 도마뱀은 / 찢고 또 쓴다’ (황병승 시, ‘여장남자 시코쿠’ 부분).

‘여장남자 시코쿠’라는 가면을 쓴 그는 반복적으로 ‘쓴다’. 강박적으로 ‘찢고 또 쓴다’. 어쩌면 그는 여행을 혐오하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부끄럽고 창피해서 차라리 입을 지워버리고’(주치의 h) 다만 시쓰기를 통해 먼 숲으로 눈보라 속으로 잠입했을지 모른다. 그는 지하실에서 더 아래 지하실로 이동하며 ‘이 세상에서 가장 부끄러운 감정으로’ ‘사라지려는 힘과 드러내려는 힘의 긴장 속에서’(‘밍따오 익스프레스 C코드 밴드의 변’) 쓰고 찢고, 또 찢고, 또 쓰지 않았을까?

“시가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집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놀이 중의 하나죠.”라고 황병승은 답했다. 자신이 창조한 살인자, 추방된 자, 광기 어린 자의 세계에서 더 이상 ‘놀이’할 의지가 사라졌을까? “죽음도 삶도 아닌 세계” (‘에로틱파괴 어린빌리지’)의 ‘수쳇구멍에 대고’ ‘치마를 갈갈이 찢으며’ ‘속삭이는 두려움이여 나를 풍차의 나라로 혹은 정지’(‘시코쿠’)라고 외쳤을까? 한 존재의 단 한 번의 여행이 화면을 도끼로 찍듯 끝나도 되는 걸까? 정지, 정지, ‘울지마 끝났어 컷! 컷!’(‘니노셋게르미타바샤 제르니고코티카’).

시인·책방이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