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들린 서점. 이것저것 뒤적이는 사이로 어린아이의 울먹이는 투정이 들려온다. 대여섯 살은 됐을까? 남자아이는 제 엄마를 나름 무섭게 흘겨보며 위협적인 타박을 쏟아내고 있다. 사달라는 장난감을 사주지 않은 듯 잔뜩 화가 나 볼멘소리를 퍼붓는다. 아직 발음도 채 완성되지 않은 혀 짧은소리.

“엄마는 정말 나빠. 진짜 나빠. 이제는 엄마를 꽉 안 안아줄 거고. 음. 또 이제는 엄마 옆에 가까이 안 앉아줄 거고. 음… 또 이제 내가 손도 안 잡아줄 거고. 음….”

아이는 제 딴에 가장 소중한 가치들을 매우 위협적인 어조로 쏟아내며 엄마를 옥죄고 있다. 빨리 항복하라는 듯 말이다. 아이가 풀어내는 그 대단한 위협거리가 지나치게 사소해서 피식 웃음이 났다.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별것 아닌 협박거리들이 귀여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아유, 큰일 났네! 엄마를 꽉 안아주지도 않고, 옆에 앉아주지도 않고 손도 안 잡아주면… 그럼 엄마는 너무너무 슬퍼서 어쩌지?”

엄마의 엄살에 아이는 의기양양해진다.

그러니까 왜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상황을 재고 있다. 아이는 자신의 나이에 내놓을 수 있는 모든 협박의 카드를 다 내어놓은 셈이다. 아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소중한 가치들. 아이의 보드라운 손으로 안아주고 만져주는 것이 최고의 선물인 엄마에게 그 모든 것을 해주지 않겠다는 협박이 유치하지만 매우 사랑스러워 나는 아이의 볼이라도 꼬집어주고 싶어졌다.

상황을 뒤로하고 돌아서는 순간, 갑자기 서글픈 생각이 밀려온다. 아이가 꺼내놓은 그 무서운 협박거리들이 내게는 언제부터 사소해졌을까? 너무 유치하고 사소해서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그 협박거리의 힘을 언제부터 잃고 살았던 것일까?

안아주고 손잡아주고 기대어주는 가장 따뜻한 사랑의 힘. 그 소중한 가치를 아예 잃고 사는 것 같아서 어른인 나는 괜스레 슬퍼졌다. ‘사실’보다는 ‘보여주기 위한 사실’을 위해 종종 진실을 포장하는 게 더 우선인 어른의 세상 속에서 아이의 순박한 이야기는 갑작스러운 충격이었다. 어른인 나는 어떤 협박에 가장 두려움을 느끼게 될까? 어떤 협상의 가치 앞에서 마음이 움직일까? 아이의 사소한 협박은 잊고 있던 내 마음속 시들어버린 순수함을 일깨우며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온종일 남·북·미 뉴스에 시선 고정이었다. 트럼프의 깜짝 트윗 제안에 5시간15분 만에 이어진 북한의 대답. 그리고 32시간의 긴박한 준비를 통해 이루어진 극적인 남·북·미 정상의 판문점 회동은 모두를 긴장시켰으며 내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동네 아줌마 대여섯이 번개팅을 해도 일주일은 걸린다. 시간 잡고 장소 정하고 각자의 일정을 조절하고 번잡스러움 속에서 날을 못 잡아 다시 미루어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불과 32시간 만에 이뤄진 세 나라 정상의 역사적인 번개팅은 예상하지 못한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했다. 그동안 반복되는 공회전 탓에 안타깝게 했던 북미 관계에 탄성과 환호가 이어졌다. 의전과 경호, 취재는 얽히고설켜 분주했지만 역대 최고급 번개 속도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다. 1953년 7월 이후 냉전의 상징으로 자리해 온 판문점. 그 군사분계선을 북미 정상이 함께 넘는 장면을 보며 우리 국민은 또다시 벅찬 희열을 품어본다. 정치의 드라마를 넘어 반드시 평화의 결실로 돌아오리라는 확신에 찬 기대감으로 말이다. 역사의 번개팅은 이 새로운 7월을 더욱 달뜨게 한다.

한 네티즌은 ‘우리는 역사를 보고 있다’는 평가를 남겼다. 답보가 아닌 한 걸음 나아가는 발전의 역사이기를 간절히 염원해본다. 서점에서 만난 어린 꼬마의 천진난만한 가치처럼 우리가 기다려 온 가장 순수한 가치인 ‘평화’ 앞에서 기대를 벗어난 꼼수나 그 어떤 속내가 섞이지 않은 소중한 선물이었음을 굳게 믿어본다.

그나저나 아이의 천진한 협박은 엄마에게 통했을까? 최선의 가치를 협박으로 여긴 아이에게 제발 장난감이 돌아갔기를! 평화의 가치를 향한 남·북·미 정상의 역사적인 번개팅을 보며 나는 아이의 순수한 가치도 목적을 이루었기를 진심으로 소망해본다.

부산영어방송 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