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과연 100년 후의 미래가 있을까? 지난달 25일 소설가 한강이 노르웨이에서 낭독한 ‘미래도서관 작가’ 소감문을 읽으며 든 의문이다. ‘미래도서관’은 매년 1명 선정한 작가에게서 미공개 작품을 받아 보관하고 있다가 2114년에 출판하는 100년 프로젝트로 2014년부터 시작했다. 한강은 지난해 ‘미래도서관 작가’가 됐는데, 이날 자신의 작품 ‘사랑하는 아들에게’를 봉인해 주최 측에 전달한 뒤 소감문을 낭독했다.

한강에게 100년 후의 미래는 결코 그 존재를 장담할 수 없는, 다만 부디 존재하기만 바라는 신앙의 대상이다. “첫 문장을 쓰는 순간 100년 뒤 세계를 믿어야 한다. 인간의 역사는 사라져 버린 환영이 되지 않았고, 지구가 무덤이나 폐허가 되지 않았으리라는 근거가 불충분한 희망을 믿어야만 한다.”

누군들 그러지 않겠는가. 철석같이 한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저버리는 불신세태에서 말이다. 타결한 지 3년 만에 뒤엎어 버린 미국의 ‘이란 핵합의’와 발표한 지 1년도 안 돼 원점으로 되돌린 ‘6·12 싱가포르 북미 공동성명’이 그렇다. 민생을 외면한 채 수개월째 국회를 비워두고 있는 정치권도 대국민 약속을 헌신짝 취급하긴 매한가지다.

“북한의 비핵화에 대해 영구적이고 불가역적이며 검증 가능할 것을 요구하듯이 우리가 북한에게 제공할 보장들 역시 마찬가지 조건을 갖춰야 하는 건 분명하다. 우리 계획은 협상을 타결해 상원에 회부하는 것이다.”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6·12 북미 정상회담 전인 지난해 5월 27일 상원 청문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6·12 회담 당일 종전선언을 거론하며 북한 비핵화와 체제 보장을 동시에 이행할 뜻을 밝혔다. 시행착오를 되풀이했던 30년 북핵 협상 역사에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하지만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달라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6·12 회담 전의 ‘선 비핵화’ 입장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지난 2월 결렬된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은 그 표변을 확인한 자리였다. 6·12 합의 이행을 원하는 북한은 미국의 입장 변화 시한을 올해 말까지로 제시했으나, 그 바람이 이뤄질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선 비핵화’가 미 행정부의 확고한 노선으로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북한은 지난달 두 차례의 미사일 발사를 통해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 재개 가능성을 시사했다. 지금 한반도의 핵시계는 자정으로 치닫고 있다.

“평화적 해결 노력이 실패하고 북한이 ICBM 실험을 한다면,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을 칠 것이다. 그리 되면 북한이 서울을 공격하면서 제2의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지배세력과 신흥세력의 충돌을 뜻하는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란 개념으로 세계사를 고찰한 그레이엄 앨리슨 하버드대 교수도 그 위험성을 경고했다. 안 그래도 우리는 미중 고래싸움 속에 새우 등 터지는 신세로 전락한 상태다.

그런데도 우리 정치권의 사태 인식과 대처는 안일하다. 보수 진영의 북핵 논리는 미국에 치우쳐 있다. 남한에 미국의 전술핵을 재배치하거나 남한의 핵보유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외려 이를 금지하는 미국보다 더 강경하다. 미 극우의 거두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보는 듯하다. 전매특허인 색깔론도 여전하다. “5·18은 북한군이 개입한 폭동” “세월호 유족들 징하게 해먹는다” 등등 막말 퍼레이드를 벌이더니, 이젠 대통령을 “빨갱이”라고 공격하고 나섰다. 북미 갈등보다 남남 갈등이 한반도를 더 위태롭게 한다. 작가 한강이 우려하는 ‘무덤’과 ‘폐허’가 어른거린다.

‘정치이성’의 부재가 낳은 황량한 현실이다. 100년 전인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미증유의 위기에 빠졌던 독일이 연상된다. 그해 현대 사회학의 아버지 막스 베버(1864~1920)는 뮌헨대학에서 민주주의를 바로세울 수 있는 정치와 정치인의 전범을 제시했다. ‘직업으로서의 정치’라는 주제의 강연에서다.

베버는 이 강연에서 대의에 대한 ‘열정’과 ‘책임의식’, ‘균형감각’을 직업적 정치인이 갖춰야 할 필수덕목으로 꼽았다. 그가 말하는 직업적 정치인이란 단순히 정치를 생계수단으로만 삼지 않는, 소명의식을 가진 정치인을 의미한다. 그는 “권력 추구가 대의에 대한 헌신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성을 결여한 채 순전히 개인적 자기도취를 목표로 하는 순간, 그때부터 정치가 직업의 신성한 정신을 배반하기 시작한다”고 했다. 시대착오적 망발을 일삼는 우리 정치인을 가리키는 듯하다.

100년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애국선열들이 내건 민주공화정신을 우리는 얼마나 계승·발전시켰을까. 되짚어 보면 부끄러움이 앞선다. 하여, 과거 100년처럼 미래 100년 또한 불안하다. 열정·책임의식·균형감각을 겸비한 소명의 정치가 간절하다.

논설위원 yisg @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