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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우리는 화가 나 있다 /김이듬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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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9-05-23 18:58:51
  •  |  본지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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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화가 나 있다. 내가 입양된 사실을 감추듯 이야기하지 않는 가족에게. 나는 화가 나 있다. 나를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 또 다른 가족에게. 나는 화가 나 있다. 쉬쉬하는 분위기에. 굳이 입양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이들에게.”

마야 리 랑그바드(Maja Lee Langvad)는 자신의 시론을 이야기할 때 입양 이야기만 주로 하게 된다며 입을 열었습니다. 담담한 표정과 지긋한 목소리로 긴장도 떨림도 없이 “나는 화가 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저에게는 인상 깊었어요. 이어서 ‘그녀는 화가 난다’라는 자작시를 덴마크어로 낭독했어요. “그녀는 화가 난다/ 그녀는 어떤 점에서는 한국에서 더 편안함을 느끼지만 또 어떤 점에서는 덴마크에서 더 편안함을 느낀다/ 그린란드에서 느낀 이후로 체험하지 못한 기분, 한국에서 그녀는 풍경 속으로 사라지는 기분이 든다.” 마야의 거의 모든 시는 슬픔과 분노가 사무쳐 있어 듣는 내내 고통스러웠습니다. 어린 시절 한국에서 덴마크로 입양되어온 이 젊은 여성시인은 한국어를 인사말 정도만 할 수 있어요.

저는 지금 스웨덴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나흘 전에 코펜하겐의 아름다운 미술관(Kusthal Charlottenborg)에서 ‘한국여성시 낭독회 및 세미나’ 행사가 있었습니다. 이런 희귀한 문학행사는 덴마크 예술재단과 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이뤄졌고, 한국에서는 김혜순 시인과 제가 초대받아 참석했습니다. 마야 리 랑그바드도 한국계 덴마크 시인으로 참석했고 미국에서는 온 시인 요하네스 고란슨(Johannes Goransson)이 세미나의 발제를 맡았습니다.

행사는 김혜순 시인이 먼저 낭독하고, 이어서 제가, 그리고 다음으로 마야가 낭독하는 순서로 진행됐습니다. 김혜순 시인께서 ‘죽음의 자서전’에 실은 작품 위주로 낭독하시고 “아직 죽지 않아서 부끄럽지 않냐고 매년 매달 저 무덤들에서 저 저잣거리에서 질문이 솟아오르는 나라에서, 이토록 억울한 죽음이 수많은 나라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죽음을 선취한 자의 목소리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고 말씀도 하셨지요.

저는 30분 동안 몇 편의 시를 읽었습니다. 꽉 찬 대규모 객석에서 낭독을 들은 덴마크 현지 남성복 디자이너는 전율과 소름이 일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메일을 받은 경험도 있는데요, 저의 낭독을 듣고 영감과 행복을 느꼈다고 하며 아직도 한국 여성은 희망이 있다고 썼더군요. 이메일을 보낸 샤롯 김 버드(Chariotte Kim Boed) 또한 입양여성입니다. 유년에 한국에서 덴마크로 보내어진 분으로, 저희의 낭독회 소식을 듣고 덴마크 먼 곳에서 코펜하겐까지 달려오셨어요.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몰라 다소 어색한 영어로 편지를 쓰셨지만 그가 느꼈던 충만한 감정만은 능히 전달받고도 남을 정도였어요.

마지막 섹션인 ‘한국 여성시에 관한 세미나’ 시간에 요하네스가 김혜순 시인과 저를 향해 질문했습니다. “한국의 여성시는 왜 이렇게 참혹한가요? 왜 죽음의 서사와 살인과 강간, 귀신, 고아, 무당, 슬픈 어머니 등의 화자가 자주 출몰합니까?” 덧붙여 그는 “한국 여성시는 너무나 특이하며 울고 불고 비명을 지를 만큼 섬뜩한 까닭을 알 수 있을까요?”라고도 물었어요. 객석은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모두 어떤 대답이 나올지 궁금한 눈치였어요.

저는 세월호 참사와 강남역 사건 등을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차별과 억압, 강간이나 성폭력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다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최고 실력의 번역가 최돈미·이지윤 작가가 곁에 있었지만, 말할 시간이 모자라서만은 아니었습니다. 행복지수 1위라는 나라에 와서 자살률 1위인 나라 국민으로서의 부끄러움 때문도 아닙니다.

김혜순 시인은 귀국하시고 저만 스웨덴 말뫼의 서점으로 와서 낭독회를 해야 합니다. 이곳에도 남한이라는 작은 분단국가에서 온 여자시인에 관심이 큰가 봅니다. 많은 분이 참석의사를 밝혔다고 하네요. 그중에서 김지혜라고 자신을 밝힌 스웨덴 입양여성이 개인적 만남을 요청해왔습니다. 경북 영주가 고향이며 한국에 네 번 방문한 적 있고 생부모가 살아 계시다고 합니다. 이곳 스웨덴의 양부모 얘기며 다니는 스웨덴 대학 얘기도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저의 스웨덴낭독회 이후에 둘이 만날 건데 저는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지. 아마 빼닮은 우리는 모국어가 아닌 말로 대화를 하며 한국에 대해 화가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 · 책방이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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