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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터치] 눈이 부시게 /김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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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9-05-19 19:16:49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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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팝꽃 피는 계절이다. 눈꽃을 인 듯 쌀가루를 덮어쓴 듯 순백의 하늘이 열렸다. 가늘게 갈라지는 꽃부리가 회흑색 가지마다 소복이 쌓인다. 뜸이 잘 든 밥알 같은 꽃잎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낙지 알 숭어리가 주렁주렁 걸린 것 같고, 멀찍이 물러서면 허연 불꽃 축포가 펑펑 터지는 것 같기도 하다.

만춘에는 하얀 꽃이 줄을 잇는다. 산딸나무 백당나무 귀룽나무 층층나무 때죽나무가 흰 불을 지피고 찔레꽃 불두화 아카시아 벽오동 등이 풋여름을 몰고 온다. 그러니 오월은 복잡한 거 다 잊고 꽃 지도를 그리며 꽃 소풍을 떠날 일이다. 백색 세상을 만들어내는 신록의 나무 앞에 오래도록 서 있어볼 일이다. 화괴(花魁)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꽃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봄철 제일 먼저 피는 매화를 이르지만, 신록의 화괴야말로 당연 이팝꽃이라 여긴다.

마침 인근 도시에서 이팝나무 장수 축원제가 열린다고 했다. 김해시 한림면 망천마을을 지키고 선 칠백 년 이팝나무가 그 주인공이다. 지인인 오방동댁 따님이 축문을 쓰고 집례를 한다는 소식에 축수를 더하는 일은 당연지사.

마을 초입에 들어서니 과연 만개한 이팝나무가 눈부시다. 코끼리 머리 모양을 닮은 상두산 아래 작은 개천을 딛고 의연하게 키를 세웠다. 고려 때부터 터를 잡았다니 어쩌면 나무가 먼저 마을을 일으킨 셈이다. 나무는 기둥 곳곳에 돌기를 달고 희뜩희뜩한 얼룩과 불거진 옹이도 스스럼없이 보여준다. 지난겨울에는 나목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드러냈을 터. 미욱한 인간은 작은 흠결만 있어도 꼭꼭 숨기려 들지 않는가.

정성을 모은 갖은 제물이 상에 올려졌다. “한결같이 이팝나무를 키워 주신 지신의 높고 신령하신 은덕에 감사드립니다”라는 제관의 축문 소리가 골바람을 타고 흐른다. 동네 노인들은 자신들보다 육백 살이나 더 나이 먹은 나무 할머니를 향해 엄숙히 절을 올린다.

그들은 이곳 이팝나무 노거수를 가리켜 ‘망천 할머니 나무’라고 부른다. 근처 주촌마을에 이백 년 연하 이팝나무 할아버지가 있는 까닭이다. 그러고 보니 축원제 사회를 맡은 분도 뜻밖에 할머니 이장이다. 아마도 이팝나무는 이장 할머니가 꽃가마를 타고 마을에 첫발을 내디딜 때 얼마나 고왔는지, 푸른 도포를 입은 마을 노인들도 한때는 풍채 좋은 호남자였음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팝꽃은 향기가 좋고 멀리 퍼지며 수관을 덮을 만큼 많이 핀다. 종소리를 멀리 보내기 위해 종이 더 아파야 하듯 꽃향기를 멀리 보내기 위해서 나무는 또 얼마나 안간힘을 쓸까. 진정 나무를 아끼는 자는 꽃 피우지 않을 때도 보러 와야 하리.

오직 한자리에서만 춤추는 나무다. 느리게 자라지만 버릴 때 버릴 줄 아는 몸짓으로 연륜이라는 나이바퀴를 만들며 세월을 구르는 나무. 나무의 삶 역시 매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거늘 오롯이 침묵으로 서 있다. 모든 나무는 늙은 나무가 아름답다. 아무리 뛰어난 작가라 한들 천년의 목숨을 사는 나무의 삶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을까.

그러기에 음유 시인들도 거목을 일컬어 제자리에 선 채로 흘러가는 강물이라 했다. 드높이 치솟은 이팝나무 흰 그늘에서 세월의 소리를 듣고자 귀 기울여본다.

나는 이 거대한 신목 앞에 세상의 중심에는 나무가 서 있다는 우주목 신화를 떠올린다. 그 옛날 인간이 출현하기 훨씬 이전에 한 그루 나무가 하늘까지 뻗었다고 한다. 뿌리는 지하 깊숙이 박혔고 가지들은 천상에 닿아 있었다. 켈트 신화의 물푸레나무와 인도의 보리수인 무화과나무와 단군신화의 박달나무도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신비로운 사다리였다. 어찌 나무가 땅에만 뿌리내릴까. 사람의 가슴에도 저마다의 나무를 한 그루씩 품고서 세상과 소통하리라 믿는다.
세월의 풍우 속에서도 장엄하게 이팝꽃 화관을 쓰고 있는 할머니 나무를 올려다본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그냥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얼마 전 종방된 나이 든 여배우의 내레이션을 다시 들려주는 듯하다. 아마도 이팝나무가 올해 피워 올린 꽃이 최고로 풍성하리라고 생각한다.

평론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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