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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유시민의 말할레오 /김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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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9-05-08 19:29:14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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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달간 날마다 아욱된장국만 나왔는데 어느 날 소고기국이 나왔어요. 딴 방의 취조실 여학우들이 엉엉 울고 난리가 났어요. 고깃국 먹이고 바로 죽이려고 한다는 거지요.”

노무현재단 이사장 유시민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중 ‘말할레오’라는 코너에서 그가 지나치듯 했던 발언이다. 사형선고는커녕 기소조차 되기 전 취조실에서 고깃국 밥상을 받자 죽음의 처형을 떠올려야 했던 대학생들의 이야기다.

그해 겨울, 서울대 다니던 고교 절친이 한밤에 찾아왔다. “며칠만 재워주라.” 전화도 없이 불쑥 찾아왔던 친구는 사나흘 쥐 죽은 듯 있다가 말도 없이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른바 ‘무림사건’이 터졌고, 유인물을 썼던 그 친구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형생활에 돌입했다. 3년 반의 형기를 마치고 나온 친구는 그동안 기다려준 여친과 결혼을 한다고 축시를 부탁해왔다. 내가 축시를 낭송한 그 결혼식의 사회는 재철이(심재철), 뒤풀이 사회는 시민이(유시민)가 봤다. 우이동 산속 뒤풀이 자리는 정말 짓궂었다. 신랑 발바닥 때리기부터 억지 술 먹이기까지. 다들 목청이 터져라 노래 부르던 산속 풍경이 아련히 떠오른다.

그때가 스무 살 갓 지났을 때였다. 치기와 열정이 버무려진 당시엔 나의 이익이라든가 장래의 계획 따위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40년 전 기억을 소환해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누가 밀고자였고, 누구는 아니라 하고. 40년 전 시민이와 재철이가 이런 기막힌 상황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문제의 진술서에 대해 나 자신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1983년 봄날 새벽, 한 떼의 수사관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방안의 모든 기록물을 압수한 후 끌고 간 곳이 그 유명한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 연행과 취조의 우두머리를 ‘조상무’라 불렀는데, 그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주범이었던 조한경 경위가 바로 조상무였다. 고백하자면 피라미였던 나는 그리 죽도록 얻어맞지는 않았다. 다만 이방 저방에서 숨이 끊어지는 비명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남영동에서 가장 난감한 문제는 매일 써내야 했던 엄청난 분량의 진술서였다. 큼직한 4절 갱지에 끝도 없이 무언가를 써내야 했다. 스토리의 개요는 수사관이 알려줬다. ‘한때 사회주의를 동경했으나 북한의 실상을 알고 뒤늦게 마음을 고쳐먹었다 ….’ 내가 엮인 사건이 기관 간의 경쟁관계 때문에 유야무야됐던 야학연합회 사건인데, 억지로 엮으려 하니 저들도 건질 내용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썼다. 일단 나는 매우 순진하고 솔직해 전부 다 분다. 이것을 글로 보여줘야 했다. 어느 식당에서 무슨 반찬을 먹었고 그때 입은 옷이 뭐였는지까지 긴 진술서는 취조관의 환심을 사기 위한 디테일 잔치였다. 그때 이미 모든 것이 노출됐던 어느 선배 이름을 아마 수십 번은 거명했으리라. 그는 이미 충분히 드러난 존재여서 모든 일을 그와 연관시키는 것이 누구도 더는 엮이지 않게 하는 첩경이라 생각했다. 제발, 그 수백 장의 개발새발 진술서가 세상에 노출되는 일은 없기를! 이유는 딱 하나. 장차 시인이자 문화평론가가 되는 인물의 문장력이 너무도 유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러 유치하게 썼다는 것을 누가 알아주랴.

한때 독립운동을 하다 변절한 인물의 변명을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다. 행적이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도 일제가 영원할 줄 알았으리라. 민주화 투사였다가 독재세력 쪽으로 노선을 갈아탄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디테일을 꺼내와 변명하고 뒤집기를 시도해도 결국은 그간 행적이 모든 진실을 말한다.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고초를 겪은 인물들이 그때 어떤 진술서를 썼는지 논쟁하는 것은 대단히 볼썽사납다. 도대체 합수부에 끌려가 얻어터지면서 고해성사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건 마치 5·18광주를 전두환 회고록으로 설명하려 드는 터무니없는 일이다. 살아남기 위해, 더 많은 것을 보호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진술한 내용을 두고 밀고라니.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의 참화가 끝나고 많이들 떠올렸다.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대해. 브레히트는 부역이나 변절을 변명하기 위해서 그런 시를 쓴 것이 아니다.

시인·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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