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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지금은 5월이니까 /유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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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9-05-07 19:17:46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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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가 무엇이냐 물으면 ‘정처 없이 걷는 일’이라고 답할 만큼 걷기를 좋아한다. 주말에는 아예 자동차를 버리고 온 동네를 걸어 다닌다. 두 정거장쯤은 기본이고 1시간 정도의 거리도 일단 걷고 본다. 걷는 재미에 폭 빠진 셈이다. 건강에 좋다는 상식적인 대답 말고도 걷는 일은 흥미롭다. 안 보이던 것들이, 못 보던 것들이 시선을 잡아끌고 마음에 들어 온다. 그래서 걷는 게 참 좋다.

그날도 예외 없이 동네를 걸었다. 시나브로 예전 살던 동네까지 이르렀다. 번잡한 사거리에 대형 현수막이 펄럭이는 커다란 가게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화장품이며 옷가지를 잔뜩 쌓아 두고 손님을 기다리는 모양이 재고 정리를 하는 모습이다. 바깥에 내걸린 마네킹의 형형색색 옷들이며 좌판의 상품까지 볼거리도 다양해 발길을 붙잡을 법도 하건만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가고 있다. 스쳐가는 사람들을 보며 주인은 얼마나 애가 탈 것인가. 위기에 몰려 원가도 안 되는 가격에 물건들을 처분하고 있다는 주인의 강한 의지가 거리를 향해 내걸린 스피커에서 한창 쏟아지고 있다.

그러다가 갑작스러운 한마디에 나는 푸하하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자자, 들어와 보십시오. 완전 쌉니다. 오늘이 진짜 폐업입니다. 오늘이 정말 마지막 날입니다. 혹시 어제도 제가 마지막 날이라고 했습니까. 하지만 오늘이 진짜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이 임대계약서상의 마지막 날이기 때문입니다.”

상술인지 진심인지 파악은 어렵지만 오죽하면 서류까지 들먹일까 싶어 새삼 주인의 진심이 애처로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의심도 든다. 내일이면 정말로 가게가 사라지는 걸까. 내일이 되면 또 다른 변명이 나오는 건 아닐까. 주인이 이틀 말미를 주어 실제로는 마지막 날이 미뤄졌다고 둘러대려나. 터진 웃음은 며칠 뒤 다시 가봐야겠다는 날선 의심이 되고 말았다.

도가 넘치지 않으면 주목하지 않는 세상. 그러다 보니 진심도 포장이 돼야 보이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믿든 말든 일단 시선을 끌어야 하니 어떨 때는 진심이 가려 보이지 않는다. 가격이 싸도 횡재다 싶은 마음보다는 일단 의심이 든다. 누군가 너무 잘 해줘도 부탁이 있어 그런가 불안함이 앞선다. 호의가 호의로 받아지지 않으니 참 안타까운 세상이다.

5월. 주머니는 텅텅 비어도 마음만은 가까운 사람들과 훈훈한 관계로 배 불러야 할 그런 달이다. 사람과의 관계가 더 깊어져야 하는 달. 부모님을 찾아 마음을 전하고, 아이들의 진심을 진정으로 헤아려야 하고, 인생을 이끌고 따라야 할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다시 바라봐야 한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더 빛나야 할 5월의 관계들이 이즘의 세상에서는 종종 더 큰 상처로 남기도 한다.

부모님에 대한 태도는 진심보다 의무일 때가 많았다. 어쩔 수 없이 행해진 의무의 관계란 감동이 적다. 메말라 있으니 오래가지 못한다. 모든 걸 다 이해한다고 약속한 아이들과의 관계는 진심보다 욕심이 앞설 때가 더 많았다. 내 마음대로 끌려와 주지 않는 아이 앞에서 욕심은 고무줄처럼 움직였다. 이해한다는 말은 그저 보기 좋은 장식이었고 아이에 대한 속마음은 탐욕이 가득 흘렀다. 어디 그뿐인가.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강조하면서도 스승의날 꽃 한 송이에 담긴 진심을 매의 눈으로 쏘아보며 편치 않은 마음을 보냈던 것은 아닐까. 정녕 일말의 의심 없이 감사를 전하며 존경의 마음을 보냈던 것일까.

5월. 관계와 관계가 더 깊어져야 할 기념일들 앞에서 나는 감동과 진심보다는 의무와 부담으로 힘들지 모를 얼룩진 5월을 걱정하고 있다. 우리에게 5월은 의무가 아니라 참된 기쁨이기를, 우리에게 5월은 정녕 부담이 아니라 들뜬 감동이기를 다시 되새기면서 말이다.
화창한 5월 사이로 다음 주말에는 사거리의 그 가게에 다시 가볼 일이다. 설사 재고정리를 마치지 못한 가게가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온전히 남아 있더라도, 그리하여 다시 마지막 날을 외치며 손님들의 발길을 끌어 가더라도 나는 기꺼이 가게 주인을 미워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심을 더 믿고 싶어지는 달. 지금은 5월이니까.

부산영어방송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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