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절제하지 않고, 바람은 쓰다듬는다. 마음이 무너지고, 세워지는 귀한 계절이다. 불 위에 놓인 듯 마음은 쫓긴다. 맹자 진심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생사세야 위사세야선 사가의(生斯世也 爲斯世也善 斯可矣).’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착하게 살면 되는 것이다.(‘사서 이치를 담은 네 권의 책’ 중에서, 신창호 역)

봄은 감정이다. 어느 국면에서건 실패하는 삶에서 우리는 쪼그라든다. 헤어날 것 같지 않은 바닥에서 분노와 수치심과 배신감에 시달리고 복수를 다짐한다. 그리고 외로움에 시달리다 어느 순간 우울에 묶인다.

한 번 일어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안에 있는 것은 삶의 깊이를 통과하여 어느 순간 밖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어느 국면에서건 성취하는 삶에서 우리는 현실의 발을 잃어버린다. 우쭐함과 오만, 우월감으로 자신을 채운다. 사회와 타인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자기만이 있다. 그러나 활짝 핀 꽃에도 폭풍은 불어 닥치기 마련이다. 성취는 여러 조건이 하나의 시공간에서 맞아 떨어져야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기에 실패는 보편적인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성취나 실패가 아니라 상황을 품위 있게 버텨내는 것 정도가 아닐까. 맹자의 구절처럼 더 착한 사람이 되고, 더 좋은 사람이 되고픈 욕망을 꿈틀거리게 하는 계절임에는 틀림이 없다.

봄은 감동이다. 중국 작가 위화의 ‘형제’에는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가 있다. 가난과 부끄러움을 의무로, 따뜻함으로 밀고나가는 이야기에는 감정이입이 깊을 수밖에 없다. 문장은 이야기에 뒤지지 않는다. 그리고 시립국악관현악단의 공연은 장엄함 속에 애잔함이 그리하여 내용 속에 형식은 절묘하게 어울려 있다. 공연은 여러 가난에 대한 걱정을 멀찍이 물러나게 한다.

감동은 느닷없을 때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럴 때면 일상의 시간과 사람 속에서 봉해 놓았던 특정한 마음이 눈치 없이 흘러나온다. ‘부산에 가면 다시 너를 볼 수 있을까. 고운 머릿결을 흩날리며 나를 반겼던 그 부산역 앞은 참 많이도 변했구나. 어디로 가야 하나….’ 최백호의 ‘부산에 가면’이다. 안에 있던 고독은 벚꽃눈처럼 오랜 시간 날린다. 외로움은 병이 되지만 고독은 사건이 된다. 고독이야말로 진짜 삶인지도 모른다.

‘알랭 드 보퉁은 예술은 자아의 균형을 회복시켜주는 기능이 있다고 했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결코 해결해줄 수 없는 빈 공간, 그 공간을 채우는 힘이 예술에는 존재한다. 일상에 매몰되었던 자신을 쉬게 하는 것, 나를 돌아보게 하고 내가 잃어버렸던 뭔가를 되찾아주는 것. 알랭 드 보퉁이 주장한 예술작품의 힘이다.’(‘휴식을 위한 지식’ 중에서, 허진모 저)

감동은 돈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다. 감동의 순간, 시간과 공간은 사라진다. 자기 안에 자기를 보고 있는 자기와 만난다. 그리고 감정을 끌어안는다. 분노를 녹이고, 자기 원망과 수치심을 잊게 하며, 복수의 칼날을 무디게 하고, 외로움과 우울을 돌려 세운다. 오만과 우월감을 부끄럽게 만든다. 감동은 삐뚤어져 있던 혹은 치우쳐 있던 자기를 바로 세운다.

‘부산에 가면’에서 촉발된 감동은 이야기로, 사건으로 조금 더 나아간다. 노래 가사는 어느 순간 ‘다시 ‘너’를 볼 수 있을까’가 아니라 ‘다시 ‘나’를 볼 수 있을까’로 들린다. 다시 나를 볼 수 있을까. 뿌리 뽑힌 그 막막한 삶이 고스란히 남은 산복도로를 지나면, 꽃 밝은 이 계절에 함락당해(1592년 4월 15일) 학살이 자행되었던 그 동래읍성에 오르면, 배고픈 시절 함께 갔던 서면시장 돼지국밥 골목에 들어서면, 분노하는 혹은 소리 없는 바다를 보면, 오래된 영광을 간직한 영광도서에 가면, 사직야구장에서 환호와 열광을 함께하면, 한 평생 세상에서 잊힌 볼품 없이 일그러지고 불쌍한 고독한 인간의 외침을 찍은 사진작가 최민식 선생이 살았던 대연동 집 앞에 서면, 다시 나를 만날 수 있다. 꽃은 절제하지 않고, 바람은 쓰다듬고, 마음이 무너지고, 세워지는 귀한 계절, 부산에 가면 다시 나를 만날 수 있다.

작가·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