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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칼럼] 나의 ‘그린북’ /정순백

인종 출신 등 평가잣대는 기회균등의 정의 뺏는 것

소수 보호 안전망 구축과 사회변화 위한 리더 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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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북’.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 남우조연상, 각본상을 받은 영화다. 하늘이 내린 천재로 불린 음악가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극심한 차별을 받아야 했던 1960년대 미국이 배경이다. 피아니스트 돈 셜리가 잘못된 관습과 편견을 깨려고 끊임없는 도전을 하는 게 줄거리다. 돈 셜리 대사 중 하나. “세상을 바꾸는 것은 천재성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용기가 있어야 한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기억에 남지 않았겠나. 편견과 모순에 가득 찬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하거나, 잘못된 질서를 바로잡으려는 사람을 지도자라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같은 범인(凡人)은 세상이 잘못됐다는 것을 느껴도 눈 감고 모른 척하고 지나가려 한다. 내 몸뚱이 하나 보전하는 게 먼저다. 기존 질서를 거부하면 반드시 뒤따르는 불이익을 감당하기가 무섭고 두려우니까. 자존심이 좀 구겨져도, 조직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높지 않은가. “야 이 놈아! 모난 놈이 정 맞는다. 니가 그란다고 세상이 바뀌나”라는 옛 어른들의 말을 늘 핑계 삼는다.

그런데 영화 속의 돈 셜리는 2개월간 고용한 백인 운전사와 남부지역 순회공연을 다니며 흑인이라는 이유로 숙소와 식당, 화장실 등을 백인과 함께 이용하지 못하는 잘못된 사회 질서와 맞서 싸웠다. 그러면서 그는 “충분히 백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흑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남자답지도 않다면, 그럼 난 뭐야”라며 자기 정체성에 의문을 던진다.

이런 극단적인 인종차별의 미국을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나라라고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인권을 탄압하고 자유를 억압했던 군사정권에 대한 반감 탓이 강했을 것이다. 세계 최고의 부자이기도 했지만,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나라인 것 같아 좋았다. 기회의 땅으로 보였다. 통제와 규제는 무조건 반민주적이라고 여겼던 때의 이야기다. 198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내며 군사정권의 어용교육을 주입받았던 많은 이는 생각이 비슷했을 것이다.
자유와 민주가 꼭 같은 게 아니라는 사실은 신자유주의의 매운맛을 보고 난 뒤 깨달았다. 서른 중반 때 무방비로 맞은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는 무한 경쟁의 시련을 주며 몸으로 느끼게 했다. 기회가 자유롭게 열려 있다고 균등한 것은 아니었다. 헤비급과 밴텀급을, 초등학생과 대학생을, 남자와 여자를 링에 올려놓고 싸우라고 하면 기회가 균등한 것인가. 조건 자체가 다르면 평등한 게 아니다. 약자를 배려하는 등 조건을 맞춰야 실질적인 기회 균등이다. 돈도, 부모도 실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 게 정의란 말이 이래서 나온다. 인종이나 배경, 지연, 학연 등에 얽매여 능력 있는 사람의 기회를 차단한다면 사회적으로 얼마나 손실인가. 사회가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사람의 능력을 매장하는 것이니까.

국가라는 게, 공권력이라는 게 이래서 중요하다. 몸뚱이 하나로 꾸역꾸역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자본의 논리가 철저히 지배하는 정글 같은 세상은 나라의 보호가 없으면 낭떠러지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회 보장이 필요하고, 이를 사회 안전망이라고 한다. 그런 안전망이 없는 사회가 영화 속의 미국이었다. 흑인은, 약자는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기껏 만든 게 ‘그린북’ 같은 책이었다. 슬픈 시대상이다.

사실 ‘그린북’이란 게 미국에 있었다는 것은 영화를 보고 난 뒤 처음 알았다. ‘그린북’은 1936년부터 1966년까지 출간된 흑인 전용 여행 가이드북이다. 여기에는 흑인이 이용할 수 있는 숙소 식당 주유소 같은 정보가 담겨 있었다. 흑인이 여행 중 출입이 금지된 곳을 이용하려다가 봉변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이다. 흑인 여행자의 안전을 위해 없어선 안 될 소중한 책이었다. 하지만 얼마나 편견이 가득했으면 피해받는 곳을 미리 알아야 했을까. ‘그린북’은 흑인이 그 시대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데 유용한 책이었지만, 정의사회 구현을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과제였다. 지금도 미국이 영화나 드라마 소설 등을 통해 흑백 차별을 고발하는 것을 보면 그 과제는 아직 유효해 보인다.

그런데 사람 사는 세상의 근본적인 이치는 동서와 고금이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요즘 우리 사회는 버닝썬 사건, 장자연 사건 등으로 시끄럽다. 사회 지도층의 특권, 재벌의 도덕적 해이, 아이돌 연예인의 끝없는 일탈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장관 등의 청문회를 하면 꼭 빠지지 않는 게 자녀 취업 특혜, 위장 전입이다. 직업의, 신분의 세습을 위한 그들의 노력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귀족화하는 그들만의 세계가 만들어지면서 이런 현상이 생긴다. 그 속에서 기회 균등의 정의가 완전히 무너질까봐 걱정스럽다. 이래서 우리 사회의 진정한 ‘그린북’이 기다려진다. 정의사회를 구현해 줄 리더십 말이다.

논설위원 sbjung@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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