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부산메디클럽

[국제칼럼] 나의 ‘그린북’ /정순백

인종 출신 등 평가잣대는 기회균등의 정의 뺏는 것

소수 보호 안전망 구축과 사회변화 위한 리더 절실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그린북’.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 남우조연상, 각본상을 받은 영화다. 하늘이 내린 천재로 불린 음악가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극심한 차별을 받아야 했던 1960년대 미국이 배경이다. 피아니스트 돈 셜리가 잘못된 관습과 편견을 깨려고 끊임없는 도전을 하는 게 줄거리다. 돈 셜리 대사 중 하나. “세상을 바꾸는 것은 천재성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용기가 있어야 한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기억에 남지 않았겠나. 편견과 모순에 가득 찬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하거나, 잘못된 질서를 바로잡으려는 사람을 지도자라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같은 범인(凡人)은 세상이 잘못됐다는 것을 느껴도 눈 감고 모른 척하고 지나가려 한다. 내 몸뚱이 하나 보전하는 게 먼저다. 기존 질서를 거부하면 반드시 뒤따르는 불이익을 감당하기가 무섭고 두려우니까. 자존심이 좀 구겨져도, 조직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높지 않은가. “야 이 놈아! 모난 놈이 정 맞는다. 니가 그란다고 세상이 바뀌나”라는 옛 어른들의 말을 늘 핑계 삼는다.

그런데 영화 속의 돈 셜리는 2개월간 고용한 백인 운전사와 남부지역 순회공연을 다니며 흑인이라는 이유로 숙소와 식당, 화장실 등을 백인과 함께 이용하지 못하는 잘못된 사회 질서와 맞서 싸웠다. 그러면서 그는 “충분히 백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흑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남자답지도 않다면, 그럼 난 뭐야”라며 자기 정체성에 의문을 던진다.

이런 극단적인 인종차별의 미국을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나라라고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인권을 탄압하고 자유를 억압했던 군사정권에 대한 반감 탓이 강했을 것이다. 세계 최고의 부자이기도 했지만,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나라인 것 같아 좋았다. 기회의 땅으로 보였다. 통제와 규제는 무조건 반민주적이라고 여겼던 때의 이야기다. 198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내며 군사정권의 어용교육을 주입받았던 많은 이는 생각이 비슷했을 것이다.
자유와 민주가 꼭 같은 게 아니라는 사실은 신자유주의의 매운맛을 보고 난 뒤 깨달았다. 서른 중반 때 무방비로 맞은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는 무한 경쟁의 시련을 주며 몸으로 느끼게 했다. 기회가 자유롭게 열려 있다고 균등한 것은 아니었다. 헤비급과 밴텀급을, 초등학생과 대학생을, 남자와 여자를 링에 올려놓고 싸우라고 하면 기회가 균등한 것인가. 조건 자체가 다르면 평등한 게 아니다. 약자를 배려하는 등 조건을 맞춰야 실질적인 기회 균등이다. 돈도, 부모도 실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 게 정의란 말이 이래서 나온다. 인종이나 배경, 지연, 학연 등에 얽매여 능력 있는 사람의 기회를 차단한다면 사회적으로 얼마나 손실인가. 사회가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사람의 능력을 매장하는 것이니까.

국가라는 게, 공권력이라는 게 이래서 중요하다. 몸뚱이 하나로 꾸역꾸역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자본의 논리가 철저히 지배하는 정글 같은 세상은 나라의 보호가 없으면 낭떠러지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회 보장이 필요하고, 이를 사회 안전망이라고 한다. 그런 안전망이 없는 사회가 영화 속의 미국이었다. 흑인은, 약자는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기껏 만든 게 ‘그린북’ 같은 책이었다. 슬픈 시대상이다.

사실 ‘그린북’이란 게 미국에 있었다는 것은 영화를 보고 난 뒤 처음 알았다. ‘그린북’은 1936년부터 1966년까지 출간된 흑인 전용 여행 가이드북이다. 여기에는 흑인이 이용할 수 있는 숙소 식당 주유소 같은 정보가 담겨 있었다. 흑인이 여행 중 출입이 금지된 곳을 이용하려다가 봉변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이다. 흑인 여행자의 안전을 위해 없어선 안 될 소중한 책이었다. 하지만 얼마나 편견이 가득했으면 피해받는 곳을 미리 알아야 했을까. ‘그린북’은 흑인이 그 시대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데 유용한 책이었지만, 정의사회 구현을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과제였다. 지금도 미국이 영화나 드라마 소설 등을 통해 흑백 차별을 고발하는 것을 보면 그 과제는 아직 유효해 보인다.

그런데 사람 사는 세상의 근본적인 이치는 동서와 고금이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요즘 우리 사회는 버닝썬 사건, 장자연 사건 등으로 시끄럽다. 사회 지도층의 특권, 재벌의 도덕적 해이, 아이돌 연예인의 끝없는 일탈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장관 등의 청문회를 하면 꼭 빠지지 않는 게 자녀 취업 특혜, 위장 전입이다. 직업의, 신분의 세습을 위한 그들의 노력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귀족화하는 그들만의 세계가 만들어지면서 이런 현상이 생긴다. 그 속에서 기회 균등의 정의가 완전히 무너질까봐 걱정스럽다. 이래서 우리 사회의 진정한 ‘그린북’이 기다려진다. 정의사회를 구현해 줄 리더십 말이다.

논설위원 sbjung@kookje.co.kr


[국제신문 공식 페이스북] [국제신문 인스타그램]

 많이 본 뉴스RSS

  1. 1[신간 돋보기] 인류 문명사에서 바라본 종교
  2. 2“조국 딸 의혹 밝혀라” 부산대생 행동 나섰다
  3. 3“과도한 조국 지키기” 여당 내서도 우려 솔솔
  4. 4북미 토네이도 발생 예측법 부산대 연구진이 찾아냈다
  5. 5한국석유공사, 국민과 소통 혁신경영…중소기업과 동반성장 생태계 조성도
  6. 6‘옥상 물탱크 없는 부산’ 주민 수요 넘치는데 예산 ‘싹뚝’
  7. 7[신간 돋보기] 천도교 교령의 ‘고려인’ 기행
  8. 8외국인 주민 지원 다문화가정 쏠림 과다
  9. 9[국제칼럼] “자기 편 옹호에도 금칙은 있는 법” /김경국
  10. 10[뉴스와 현장] 아들아, 조국이 아니라 미안하다 /유정환
  1. 1동양대학교 관심집중...조국 후보자의 부인 ‘정경심’때문
  2. 2고대 ‘촛불 집회’제안자, 한 때 자유한국당 ‘청년 부대변인 내정자’논란
  3. 3‘한끼줍쇼’ 오현경-강호동 커플티 입고 등장?... 과거 열애설에 “두분 연인이셨습니까?”
  4. 4황교안 “내가 법무부 장관 지낸 사람인데, 조국 거론되는 게 모독”
  5. 5공지영 “조국 딸이 받을 상처, 가족 사생활 공개 상식적인가”…촛불까지 언급
  6. 6‘조국 딸 학위취소’ 국민청원 비공개 전환한 청와대… 삭제·비공개 조건 보니
  7. 7靑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종료…韓 노력에 日 호응 없어"
  8. 8민주, 野 조국 청문회 보이콧 기류에 '국민 청문회' 검토
  9. 9 지소미아 연장 파기 결정 "우리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
  10. 10지소미아 파기 결정 지소미아란?
  1. 1한국석유공사, 국민과 소통 혁신경영…중소기업과 동반성장 생태계 조성도
  2. 2한국동서발전, 신재생에너지 사업 국산기자재 확대…경제 살리기 앞장
  3. 3부산항만공사(BPA), 지역아동센터 어린이 위한 캠핑 행사
  4. 4‘브렉시트 이후에도 무관세’ 한-영 FTA 체결 서명 완료
  5. 5‘도시놀이터 프로젝트’ 활기…HUG, 부산시교육청에 3억 후원
  6. 6저소득층 소득 감소 멈췄지만…고소득층과 격차 역대 최대
  7. 7선원고용센터 잇단 비리 불거져 내홍
  8. 8학교시설 공사 원가 현실화…지역 건설업계 ‘가뭄에 단비’
  9. 9BNK, 지역기업 돕기 팔 걷어…일본 규제 긴급 자금 2000억 편성
  10. 10가계빚 1550조 돌파
  1. 1SRT 추석 예매 시작…피 튀기는 ‘피케팅’ 성공 노하우 공개
  2. 2북한 방사능에 주민들 피폭 증상?... 한국에 폐기물 유입 가능성도 있어
  3. 3부산대, 조국 딸 의전원 입학과정 전반 내부 조사 착수
  4. 4부산 호우주의보…세병교 수관교 등 일부 도로 통제
  5. 5만취 30대 운전자, 택시 전봇대 담벼락 들이받고 뺑소니
  6. 6공지영 SNS에 조국 지지 게시물 올려...괴벨스의 발언도 인용해
  7. 7이재정 교육감 “조국 딸 논문은 ‘에세이’…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
  8. 8고려대 학생들 내일 오후 6시 교내서 촛불집회
  9. 9경기대 총학 “사학비리 시절로 돌아가려는 경기대를 살려주세요”
  10. 1091세 노모 등 직원으로 허위 등록, 보조금 횡령한 버스업체 대표 검거
  1. 1‘리틀야구 월드시리즈’ 어린이 한일전...결승 티켓 놓고 맞대결
  2. 2부산시청 소속 청원경찰, 세계경찰소방관경기대회서 주짓수 부문 2관왕
  3. 3스포츠혁신위, 체육회-KOC 분리 권고…체육계 "시기상조"
  4. 4남자 테니스 ‘빅3’ 질주, US오픈서도 계속될까
  5. 525세 이하 골프 유망주 임성재 6위·김시우 7위
  6. 6류현진 FA시장 ‘태풍의 눈’
  7. 7‘축구 유망주’ 17세 서종민, 독일 프랑크푸르트 계약 임박
  8. 8농구월드컵 앞둔 김상식호, 24일 인천서 최종 모의고사
  9. 9
  10. 10
우리은행
지방분권으로 도시 살린다
대학이 가져온 ‘부’- 독일 하이델베르크
지방분권으로 도시 살린다
친환경에서 캔 ‘노다지’- 독일 프라이부르크
강동진 칼럼 [전체보기]
진정한 탈일본을 결단할 때
이기대·청사포가 눈앞서 사라진다면
기고 [전체보기]
부산시, 시내버스 업계와 소통부터 /박보영
부산포해전을 부산대첩으로 격상하자 /서정의
기자수첩 [전체보기]
극한직업의 수상구조대 /임동우
옛 해운대역 도시재생 롤모델로 /이승륜
김용석 칼럼 [전체보기]
달에는 토끼가, 지구에는 청룡이 산다
기생충의 세상, 그 우화의 이면
김지윤의 우리음악 이야기 [전체보기]
조선 시대 선비들의 음악문화
전통 가곡인가, 한국 가곡인가
뉴스와 현장 [전체보기]
아들아, 조국이 아니라 미안하다 /유정환
신라젠 쇼크 줄여야 바이오가 산다 /이석주
도청도설 [전체보기]
여름에 네가 한 일
자동차 깜빡이
문태준 칼럼 [전체보기]
조선시대 ‘북캉스’ 풍경
데이비드 호크니의 첫 생각
박상현의 끼니 [전체보기]
경상도의 여름음식 찜국
품종을 따져라, 밥맛이 달라진다
사설 [전체보기]
조국 후보자 딸 입시 의혹 보통 시민 납득하겠나
북미 진척 없는 북핵 실무협상 조속히 재개해야
이상이 칼럼 [전체보기]
중앙정부와 지자체 복지 역할 재정립
‘건강보험 하나로’와 문재인 케어
이은화의 미술여행 [전체보기]
예쁘고 행복한 그림의 화가
바람둥이 화가의 영원한 사랑
이홍 칼럼 [전체보기]
일본은 실수했다
창의성, 한국기업의 다음 생존전략
장재건 칼럼 [전체보기]
조국의 ‘서해맹산(誓海盟山)’
두 정치인의 죽음
제언 [전체보기]
광안대교, 해양안전 감시시스템 구축을 /이윤석
조영석의 음악이야기 [전체보기]
더위 식혀주는 음악들
7월의 음악예찬
최태호의 와인 한 잔 [전체보기]
은은한 피노누아 같은 사람
닭백숙과 와인…더위를 이기는 조합
황정수의 그림산책 [전체보기]
김윤겸의 실경산수 ‘태종대’
김정희를 흠모한 이한복
  • 2019 ATC 부산 성공기원 시민대회
  • 2019아시아 트레일즈 컨퍼런스
  • 사하관관사진공모전
  • 제5회 극지 해양 도서 독후감 공모전
  • 부산관광영상전국공모전
  • 유콘서트
  • 어린이경제아카데미
  • 어린이극지해양아카데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
스토리 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