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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그대라는 우산 /박형준

불의 사고로 연인 잃은 소설 속 d라는 주인공, 극한 고통·상실감 느껴

속수무책인 상황에서 우리들도 미약한 존재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9-03-13 19:34:02
  •  |  본지 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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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저녁 아내와 함께 동래읍성 산책을 다녀왔다. 극성스러운 미세먼지의 심술을 달래듯 봄비가 차분히 내린다. 각자 우산을 쓴 채 걷다, 비가 조금 잦아들면 우산을 접었다가, 다시 비가오면 우산 하나로 서로의 어깨를 붙였다.

해가 진 읍성의 촉촉한 흙길을 따라 걸으며, 근자에 출간된 황정은의 연작소설을 생각했다. 바로, ‘디디의 우산’이다. 이 책에는 ‘d’와 ‘아무 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라는 두 편의 중편소설이 수록돼 있다. 이미 문학 매거진에 발표된 것이지만 이들 작품은 작가의 연작기획에 맞게 재구성된 텍스트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첫 번째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는다. 표제 ‘d’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현대인의 익명성을 기호나 숫자로 표현하는 인물묘사 방법이야 새로울 게 없지만, 핵심인물을 d로 호명하는 서사 전략은 예사롭게 보아 넘길 문제가 아니다. d의 시선 속에 포착된 등장인물이 이승근, 고경자, 김귀자, 김정엽, 윤충길, 윤선오, 여소녀 등과 같이 이름을 가진 인물로 명명되는 것과는 상반된다. 그렇다면 황정은의 d는 어떤 캐릭터인가.

작품 속에 노골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d의 의미 맥락을 살펴보면 ‘데스(death)’ 정도가 될 듯하다. 물론 주인공 d의 실존적 상태를 나타내는 알파벳 기호는 생물학적 죽음보다는 사회적 죽음을 표상한다. 타인과의 의사소통망이 단절되고 공동체 내에서 소외된 인간, 다시 말해 어떤 효용적 쓸모도 갖지 못하는 인간이 d인 셈이다. 아마도 장편소설 ‘여기에 없도록 하자’의 저자 염승숙이라면, ‘d’를 ‘햄’이라고 불렀을 테다. d는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 반쯤 죽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좀비와 다를 바 없는 사회적 잉여체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이라면 ‘쓰레기가 되는 삶’이라고 명명했을 철학적 대상이자 의제이다. 학생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D’야말로 가장 곤혹스러운 평가 표기(학점)이다. ‘F’ 상태가 되면 아예 교과목 이수를 포기하거나, 재수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D는 어떠한가? 재수강을 하기도 그렇고 안 하기도 그렇고, 대략 난감이다.

결국 d란 확실히 낙오(fail)하거나 파산하진 않았으나, 인생이라는 커리큘럼에서는 벼랑 끝까지 내몰려 있는 위태롭고 취약한 생의 조건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d는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며 살아가는 뭇 청년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d의 열악한 직업(“김포공항 식자재 센터”에서 “음식물쓰레기”를 치우는 일)과 궁핍한 거주 공간(“대규모 아파트단지와는 거리”가 있는 “가장자리”)은 그의 왜소함과 주변성을 통일성 있게 구성하는 성격화(characterization) 기법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작품에 공감하는 까닭은, 작가의 빼어난 언어 감각과 미학적 퀄리티 때문이 아니다. 황정은 소설의 진정한 가치는 서사 전개의 매끄러움과 문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작가적 윤리에 있다. d에게는 회복이 불가능한 상처가 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연인인 ‘dd’를 잃은 트라우마가 그것이다. 십여 년 만에 동창회에서 만난 두 사람은 조금씩 가까워지고, 서로가 서로의 ‘우산’이 된다. d는 dd의 우산 속으로, dd는 d의 우산 속으로 들어가 비를 피한다. d는 dd를 만나 행복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즐거운 삶도 잠시, dd는 퇴근길에 급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dd의 죽음과 부재는 애척의 슬픔만이 아니라, d의 몸에 있는 온기를 모두 앗아가는 참담한 고통과 자기 파괴적 상실감을 안겨준다.

d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따뜻하게 감싸주는 dd가 있기에 외롭고 고단한 삶을 견딜 수 있었다. dd의 물건에는 여전히 온기가 남아 있지만, 그는 더 이상 이곳에 없다. 어둡고 차가운 도시를 함께 걸어갈 동반자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소설의 이야기는 주인공 d가 겪게 될 드라마틱한 사건이 아니라 dd의 황망한 죽음/부재로부터 시작된다.

비바람을 막아줄 ‘마음의 우산’이 찢어진 시대, 이런 각박한 세상에서도 인간의 생은 지속될 수 있을까. 황정은 작가는 궁극적으로 세월호와 같은 “속수무책”의 참상을 목격한 이후에도,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의 윤리적 부채와 실존적 가치를 되묻고 있다. 돈이 많든 적든, 권력이 있든 없든, 우리는 누구나 예기치 못한 충돌 한 번에 난파될 수 있는 미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이다. 또 나이가 들수록 우리 몸은 점차 마모되고 부서질 수밖에 없다. 황정은 작가의 말처럼 그것은 “잔혹한 광경”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길을 함께 걸어갈 ‘그대라는 우산’이 있다면, 조금은 남은 여정이 덜 외롭지 않을까.

비가 내린다. 비가 오지 않는다. 또 다시 비가 내려도 어깨가 젖지 않는다. 그대가 ‘나’의 우산이 된다. 그대가, 그대만이 ‘우리’의 우산이 된다.

부산외대 한국어문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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