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기록하는 것은 인간만이 가진 특징이다.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을 선사시대라고 하지만 그때도 원시 예술가들은 동굴벽화라는 기록을 남겼다. 신빙성 있는 과거의 기록은 근거 없는 현재의 주장을 압도한다. 최근 보도되는 ‘미투’ 관련 재판에서는 피해자의 10년 전 일기장과 메모가 가해자의 일방적 주장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러나 기록을 왜곡하는 것도 역시 인간이다. 모든 사기사건과 각종 ‘가짜 뉴스’와 ‘댓글 조작’의 본질은 결국 기록을 왜곡하는 데 있다. 인간의 역사는 기록을 남기는 것과 함께 기록의 방어 즉, 기록의 위·변조를 막는 노력의 과정이었다.

문서 사진 그림 소리 등 기록의 방법은 대단히 많지만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문자를 이용한 문서다. 문맹률이 높았을 때 문자를 모르는 사람들은 상거래나 금전거래를 할 때 종이가 아닌 나무에 문자가 아닌 기호로 기록을 남겼다. 괴나리봇짐을 메고 전국의 장터를 누비던 보부상들이 주막에서 외상 술이라도 먹게 되면 회초리에 외상액만큼 칼로 눈금을 새겼다. 그 회초리를 ‘엄대’라고 하는데, 엄대에 칼로 외상기록을 긋는 데서 ‘외상을 긋다’라는 말이 나왔다.

나무에 칼로 금전기록을 남기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흔했다. 일본에서는 외상을 ‘카케(掛け)’라고 한다. 이것은 엄대를 가게 벽에 매달았기[掛] 때문에 생긴 말이다. 영국에서도 국왕이 백성에게 빚을 얻을 때 나뭇조각에 채무기록을 칼로 새겼다. 다만 우리 주막 주인과 달리 영국 왕은 채무기록을 두 개로 만들어 하나는 채권자에게 주었다. 이때 채권자가 가진 나뭇조각 즉, 권리증표를 스톡(stock)이라고 불렀다. 스톡의 뜻이 변해 오늘날 주식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주인 혼자 보관하는 엄대는 중앙집중형 원장이고, 거래 당사자들이 각기 보관하는 영국의 스톡은 분산형 원장이다. 후자의 장점은 그 자체가 유통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영국의 스톡은 상인들 사이에서 화폐처럼 유통됐다. 어차피 언젠가는 세금을 내야 할 상인들이 왕에게 미리 세금을 내는 셈 치고 돈 대신 스톡을 주고받았다. 스톡이 납세증명서로 간주된 것이다.

21세기 들어 영국의 스톡 즉, 분산형 원장을 전자적 형태로 바꾸는 기술이 개발됐다. 그래서 누구든 컴퓨터를 통해 거래를 기록하고 그 기록 또는 증명서를 유통할 수 있는 방법이 생겼다. 블록체인기술이 그것이다. 이 기술은 분산형 원장의 최대 약점 즉, 기록의 위·변조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어 인류의 오랜 고민거리를 해결했다. 유감스러운 점은 금전에 관한 기록을 금전 그 자체와 쉽게 혼동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스톡이 화폐처럼 유통됐지만 화폐는 아니었다. 화폐를 대체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21세기 인간은 블록체인기술과 화폐의 구분을 잠시 망각했다. 심지어 기존 화폐가 사라진다고 믿었다. 그것이 1년여 전 세계를 휩쓴 비트코인 광풍이다. 누구든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착각과 욕심에서 비롯된 일이다.

다행히 이제는 냉정을 되찾고 기술과 화폐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지난 15일 열린 ‘부산 금융중심지 1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블록체인기술을 부산의 미래와 연결해서 토론한 것이 그 예다. 과거 기록을 왜곡하지 않는 기술이 미래의 번영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요지였다. 그 자리에서 필자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물동량 세계 6위 부산항이 더욱 발전하기 위해선 블록체인기술을 이용한 ‘부산형 기록표준’을 만들어 드나드는 배에 적용하자는 것이었다. 바다를 통해 유통되는 물자의 원산지와 행선지, 품질과 수량은 일일이 확인하기 힘들다. 거기서 비리와 부정, 불신의 싹이 튼다. 만일 ‘부산항을 드나드는 물자의 과거 기록은 절대 믿을 수 있다’는 신뢰가 싹튼다면 부산항은 신뢰의 터전이 될 것이다. 국제무역에서 ‘절대반지’를 얻는 효과가 있다.

홍콩은 지난해 무역금융 서류에 블록체인기술을 적용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기록의 바꿔치기를 봉쇄해 홍콩을 정직의 땅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부산항의 미래. 그것은 부산항을 스쳐가는 물자의 과거를 굴절 없이 관리하는 데 있다. 결국 굴절 없는 과거가 굴절 없는 미래다.

한국은행 부산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