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철은 없었지만, 열정만은 대단했던 시절. 현실보다 이상이, 밥보다 이념이 중요했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1987년 봄 군에서 제대한 뒤 대학 2학년에 복학했을 무렵이었다. 단과 대학 학생회의 간부였던 후배와의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는 북한 김일성 주석의 황당한 항일투쟁 영웅담을 장난스럽게 말했다. 취기가 좀 오르고 이야기가 사회 변혁 운동으로 옮겨가자 대남방송에 나올 법한 이야기를 했다. “김일성 주석은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다. 미 제국주의로부터 조국 해방을 위해 남과 북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등의 말을 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고 물으면 “농담입니다”며 슬쩍 넘어가려는 게 아닌가.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알았다. 그는 주체사상을 전파하는 강철서신이란 운동권 팸플릿에 빠져 있었다.

당시 대학 운동권의 분위기가 그랬다. 사회구성체란 이념 논쟁이 한창이었다. 한국 사회 발전단계가 어디인가, 변혁의 주체인 민중의 범위와 대상인 주적을 놓고 끝 간데없이 싸웠다. 다수파는 민족해방(NLPDR) 노선이고 소수파는 제헌의회(CA) 노선이었다. CA 측은 러시아 혁명을 흉내 내 군사 정권 타도와 제헌의회 구성을 통한 새로운 나라의 건설을 주장했다. 하지만 학생들의 호응을 별로 얻지 못했다. NL은 달랐다. 애국과 민족, 통일이란 말이 20대 청춘의 감수성을 자극했다. 반미 자주독립 민족대단결을 외치며 세를 확산했다. 6월 항쟁 과정에서는 직선제 개헌을 내세워 시민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때 대학가를 강타한 게 강철서신이고 사상의 주체, 정치의 자주, 경제의 자립, 군사의 자위 등을 주장한 주체사상은 NL계 다수파의 이론적 토대였다.

그로부터 강산이 반쯤 변했을 즈음 그 후배를 만나 지난날의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졸업 후 자영업을 하면서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고 있었다. 그사이 세상도 많이 변했다. 문민정부가 들어섰고 사회주의권은 몰락했다. 사회주의 혁명가인 레닌의 동상은 동유럽 곳곳에서 앞다퉈 무너졌고 종주국인 소련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술자리에서 다시 물었다. “그때 ‘김일성의 영웅담’을 믿었느냐, 지금은 북한 체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는 “이제 와서 무슨 …”이라며 웃어넘겼다. 그러면서 군사정권의 물리적 폭압에 정면으로 맞선 용기만은 기특하지 않으냐고 말했다.

그랬던 것 같다. 당시 그가 지키고 싶었던 시대정신은 따로 있었을 것이다.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고속 성장이 만든 우리 사회의 그늘을 지우고 싶지 않았겠나. 왜곡된 현실을 변화시키려고 한 노력은 인정해 줘야 한다. 게다가 그때는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특히 북한에 대한 정보는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억누르는 힘이 강한 만큼 튀어 오르는 힘도 강한 법. 군사정권의 철저한 반공 교육과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는 제도권의 정보를 모두 거짓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왜곡된 체제가 왜곡된 저항을 낳았던 것이다.

시대정신을 지키는 방법도 몰랐다. 가르쳐 주는 이가 없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그렇게 한다고 세상이 바뀌나’ ‘부모님을 생각해 공부나 열심히 해라’ 등과 같은 설득은 현실과 타협한 기성세대의 자기변명으로 들렸다. 그러니 러시아 혁명 이론과 주체사상에다 우리 문제를 억지로 끼워 맞춘 논리에 매달린 것이다. 사회주의가 몰락해 가고 있었는데도, 사회구성체 논쟁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황당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요즘 자본주의 상징인 미국에서 사회주의가 인기라고 한다. 젊은 청춘 사이에는 열풍이란다. 18~29세 유권자 중 51%가 사회주의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한 갤럽 조사 결과가 있다.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정치인도 있다.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대표적이다. 그는 2016년 대선 때 민주당 경선에 출마해 아웃사이더 돌풍을 일으켰고 최근 2020년 대선 출마도 선언했다. 출마 선언 하루 만에 592만5771달러를 모금했다. 민주당 오카시오-코르테스 하원의원(뉴욕)은 ‘민주적 사회주의자’로 자처하며 인기를 끌고 있다. 이들이 내세우는 정책은 부자 증세, 보편적 의료보험, 공립대학 무상 교육, 대기업 규제 등이 핵심이다. 대학·주택 자금 빚과 저임금, 열악한 사회복지 등도 고치겠다고 한다.

그래 맞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 법이다. 세계 최고의 부를 이룬 미국이지만, 빈부격차도 세계 최고다. 부자 3명의 재산이 1억6000만 명의 재산보다 많을 정도로 소득이 불평등한 나라가 미국이다. 일자리는 부족하고 집을 살 희망이 까마득한데, 나라가 부자면 뭐하나. 이런 왜곡된 체제를 고쳐 주겠다는 사회주의 정치인이 인기 끄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밥보다 중요한 이념은 없으니까. 미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따뜻한 밥을 더 많이 보장하지 못하는 체제에 등을 돌리는 것은 가진 게 별로 없는 이들의 생존 본능이다. 동서와 고금이 따로 없다.

논설위원 sbj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