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케냐 나이로비 국립공원은 현재 건기가 한창이다. 사파리용 자동차를 타고 현지인의 안내를 받으며 지평선 끝자락에 걸린 도시의 빌딩을 배경으로 거대한 국립공원의 초원을 달린다. 잔뜩 기대하고 나선 사파리인데 비포장 길의 덜컹거림 탓인지, 해발 1600ｍ가 넘는 높은 고도 탓인지, 이미 시작된 몸살 때문인지는 몰라도 계속 잠이 쏟아진다. 그 와중에 물가에 차를 멈추고 하마를 본 듯도 하고, 골든 크라운 크레인이라는 색상도 고운 물새도 보았건만 잠결이 반이었다.

그러다 가이드의 목소리가 다급해지고 차량의 속도가 빨라져 잠이 깨기 시작했다. “라이온, 라이온!” 조용하지만 다급한 목소리에 벌떡 일어나 보니 암사자의 모습이 누런 풀밭 속에서 보였다. 풀보다 약간 큰 키의 암사자는 고개를 들면 보이지만 몸을 웅크리면 그대로 누런 풀밭 속에 사라져 찾을 수가 없었다. 50ｍ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타조와 임펠라 무리를 사냥하는 중인 듯 보였다. 보일 듯, 말 듯 누런 풀들 사이를 걷는 암사자의 발걸음이 가볍고 신속하기만 했다.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갈 정도의 긴장감이었다. 물론 이날 암사자는 운이 따르지 않아 눈치 빠른 임펠라가 바짝 긴장하여 도망을 치고, 타조도 자리를 서둘러 떠나면서 사냥이 끝이 나고 말았다.

그런데 내게 감동은 암사자의 사냥이 아니었다. 누런 초원의 풀밭에서 나는 왜 사자의 털 색깔이 그렇게 누런 색이었는지를 명확하게 알았다는 점이었다.

아프리카 초원에는 키가 큰 수목이 거의 자라지 못한다. 그건 일년에 25㎜ 미만의 비가 내리고, 이 강수량도 짧디짧은 우기에 몰려있는 탓에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숲을 형성할 수 있는 상황이 못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프리카의 광활한 땅은 아마존에서 보는 열대우림의 숲이 아니라 짧은 시간 안에 자랄 수 있는 초본식물(풀)이 대부분이고, 우기에 잠시 초록이 되었다 곧 다시 누렇게 장시간 마른 풀밭을 연출하게 된다. 그러니 이 초원에서 살아야하는 동물들은 대부분 누런 풀색과 비슷한 털을 지닐 수 밖에 없다. 사자의 털이 누렇고, 임펠라, 톰슨가젤 등 초식동물의 털이 대체로 누런 까닭이 그러하다. 사자와 초식동물은 서로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 관계지만 결국 주변 식물의 색과 비슷하게 자신을 만들어 스스로를 보호하고 살아가는 것은 마찬가지인 셈이다.

방송작가 시절의 나와 가든디자이너로 살아가는 지금의 나는 보는 눈이 많이 다르다. 세계 인식이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 우리나라를 떠나 낯선 외국에 도착하면 신기하게도 이전에는 전혀 관심도 없던 것들이 가장 먼저 들어온다. 바로 식물들이다. 거리에 심어진 가로수,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거기에서 스스로 자라는 식물들이 참으로 다르다는 사실에 매번 놀란다.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이 식물들의 형태와 특징이 그 지역의 삶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사막형 기후 지역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식물들의 잎이 작아지고, 가시가 많아진다. 잎이 작아야 하는 이유는 강수량이 적어 땅으로부터 흡수하는 물은 극소량인데 잎의 기공을 통해 수분이 빠져나갈 확률은 높기 때문이다.

온도가 높고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의 식물들은 잎이 크고, 나무가 위로가 아니라 옆으로 크게 자란다. 큰 잎으로 수분을 잘 날려보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키가 큰 나무뿐만 아니라 그 밑에서 자라는 초본식물도 잎이 엄청나게 크다.

이유는 그늘에 가려 부족해지는 햇볕을 조금이라도 충분히 받기 위해서다. 물론 바탕이 되는 식물들이 이렇게 다른 크기, 형태, 색상을 지니고 있으니 이 터전에서 살아야 하는 동물들의 형태와 색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식물과 동물, 우리 모두는 치열하게 경쟁하고 치명적이기도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보호색이 되어 살아간다. 그래서 가끔 이상한 생각이 들곤한다. 사파리 초원의 지평선 끝에 서 있는 거대한 도시의 실루엣도 이 지구의 다른 생명체의 보호색이 되어 주고 있나? 그리고 우리도 이 안에서 자연의 보호를 받고 있는 중일까?

케냐에서 들은 현지 뉴스는 갈수록 심각해지는 환경 파괴 탓에 동물의 멸종이 더욱 심각해진다는 슬픈 소식이었다.

작가·가든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