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영어책 읽기 소모임을 시작했다. 첫 책으로 ‘어린 왕자’를 읽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소리 내어 읽고 듣는 방식이다. 한 번에 한두 장(章)을 읽고 이야기를 나눈다. 실제 생활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번역식 독해에다 단문으로 주고받는 토론을 영어능력자가 보면 우습겠지만 우리는 꽤 진지하다.

첫 책을 ‘어린 왕자’로 정한 이유는 단순했다. 모두 내용을 알고 있고 분량도 적어 부담 없이 시작하기에 딱 좋았다. 흔히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읽을 때마다 다른 감동을 준다고들 말한다. 동감이다. 나도 여러 번 다른 장면, 다른 단어에 걸려 넘어져 마음을 헤아려 본 경험이 있으므로. 그러나 새로운 감동 같은 건 기대하지 않았다. 이미 감동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언어의 제약으로 한 문장 한 문장 미독(味讀)하다 보니 헌사에서부터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리고 의외의 장면에서 마음이 정말 아팠다.

여섯 살에 그림을 포기하고 비행기 조종사가 된 ‘나’는 사막에 불시착한 뒤 어린 왕자를 만난다. ‘나’는 무척 놀랐지만 어린 왕자가 요구하는 대로 양을 그려준다. 양 덕분에 어린 왕자와 B-612로 추정되는 행성에 대해 조금씩 알아간다. 양이 어린 바오밥을 먹을 거라 좋아하던 왕자는 양이 꽃도 먹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사로잡힌다. ‘나’는 비행기 엔진을 고치느라 어린 왕자의 걱정을 귀담아듣지 않고 아무렇게나 대답한다. 어린 왕자는 격정에 싸여 항의한다. 수많은 별 어딘가에 자신이 사랑하는 꽃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누군가는 충분히 행복하다. 하지만 양이 그 꽃을 삼켜버리는 순간 모든 별은 빛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데도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예전의 나는 이 장면에서 멈추지 않았다. 뇌리에 각인된 몇 개의 장면 중 이 부분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래 멈춰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린 왕자의 외침에 다른 목소리들이 생생하게 겹쳐 들렸기 때문이다.

김용균의 어머니는 화력이라는 말만 들어도, 발전소라는 글자만 봐도 ‘내 아들 일하는 곳이네’ 했을 것이다. 혹 다른 지방에 살았다면 태안이라는 지명만 봐도 ‘내 아들 있는 곳이네’ 했을 것이다. 그 아들이 없는 세상은 모든 별이 빛을 잃어버린 세상이다. 그런데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아들이 식품회사에 취직한 다음부터 모든 식재료는 그 회사 것만 이용한다. 아들이라는 꽃이 있어서 그 회사가 환한 별이 된 것이다. 나도 그렇다. 같은 사고 소식이라도 내 아이와 같은 나이, 내 아이와 같은 이름을 가진 누군가가 겪은 사고에 훨씬 놀란다. 그런데 사회 초년생 김용균의 죽음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김복동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거액의 보상금이 아니라 진정한 사과의 말 한마디를 바랐는데 사과를 끝내 받지 못하고 돌아가신 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어린 소녀를 성노예로 짓밟은 일을 사과받고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어린 왕자가 어떤 행성에서 만난 신사는 꽃향기 한 번 맡아본 적도, 별을 바라본 적도, 누군가를 사랑한 적도 없이 오로지 숫자만 더하고 또 더하면서 그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어린 왕자는 ‘나’에게 꽃이 사라지고 별이 빛을 잃는 것보다 그 신사가 계산한 숫자의 합이 더 중요한 문제냐고 항의한다. 분노로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목이 메어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다. 어린 왕자의 외침과 눈물에 뭐라 대답해야 할까. 정말 중요한 문제는 무엇일까. 삶은 결코 만만한 게 아니니 누구에게나 고통은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내가 감당해야 할 내 몫의 문제가 있다. 그렇지만 그게 정말 누군가의 별이 꺼지는 것을 외면해도 좋을 만큼 중요한 문제일까? 

‘나’는 늦게나마 해머를 내려놓고 어린 왕자를 껴안았다. 당장 할 일은 ‘나’의 행성 지구를 방문한 어린 왕자를 편안하게 해주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나’는 어린 왕자를 껴안고 토닥이며 양의 입마개와 꽃의 덮개를 그려주마고 약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어린 왕자의 마음에 가 닿았다.

나도 얼른 내 문제를 내려놓고 누군가를 껴안았나. 그러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이 장면에 걸려 넘어진 것 같다. 지구를 방문했던 어린 왕자들에게 많이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