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이틀. 광주에서 이틀. 스무 곳에 달하는 목표점. 예상 일정표에서 거리 시간 지역의 특징을 일별해 보면서 ‘느린 서점 여행’ 계획이 무모했음을 깨달았다. 일정을 수정해 방문지를 줄였다. 그곳을 변화시킨 ‘이웃’들의 ‘느린 속도’를 나 또한 선택해야 이 모두가 보인다는 걸 알았다.

운진항에선 승선시간과 별도로 바다의 파도 상태가 출항을 허락했고, 특히 ‘분실 과실 배상’이 적시된 렌트카 계약서와 달리 가파도 어르신들이 운영하는 ‘자건거포’에선 계약서 한 줄 쓰지 않고 자전거를 인계받았다. 덧붙인 주의사항. 바람이 세게 불면 쉬었다 가고, 오르막은 자전거에서 내려 옆에서 밀고 갈 것. 식당에 들어가면 바람 불면 넘어지니까 바닥에 뉘어둘 것. 자물쇠는 없음. 누구도 안 가져가니까. 청보리가 자라는 가파도에선 길고양이와 사람이 서로의 속도를 침범하지 않으며 같이 걸었다. 귀를 보니 중성화수술 후 방사한 표식인 TNR 커팅이 없다. 누군가 약속의 매듭, 나비넥타이 등을 매어준 고양이들은 느긋하게 돌담 위에 앉았다가 사람을 향해 다가와 한참 놀다 제 길을 갔다. 가파도 고양이들은 부산 ‘청사포’의 고양이마을보다 먼저 사람과 동물이 공존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한 대기업이 이 마을 주민의 삶을 들여다 본 후 진행한 문화 디자인 프로젝트에서도 제주해녀와 함께 가파도 돌담위의 고양이를 마을 대표 디자인으로 선정했다. 고양이 두 마리가 다가오자, 반납 자전거를 받던 어르신은 분주한 손을 멈추고 고양이 사료를 새 모이처럼 내 주었다. 여행자는 거들 뿐, ‘실시간’ 탁발에 익숙한 고양이와 어르신, 길 위의 식구였던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풍경이 되어 있었다.

섬에서 나와 ‘제주 무명서점’으로 향했다. 2018 작가와 함께하는 작은서점 지원사업으로 지역 작가와 시집을 깊이 읽는 프로그램, 독자 추천을 받아 엄선한 책 ‘독자 협동 큐레이션’, 이웃들로부터 물려받은 가구로 채워진 서가에 앉아 존 버거의 ‘아내의 빈 방’을 사서 읽는다. 죽음 후에 오는 것들을 떠올리는 시간을 만나는 무명서점 낡은 의자에 그대도 머물러 보기를.

‘그림책카페 노란우산’으로 길을 잡았다. 그림책 원화전시와 어린이 드로잉 책방 담벼락 전시, 그림책 테리피가 열리고 있었다. 조용한 바닷마을 낮은 돌담의 옛집 ‘그림책 작가 레지던스’는 ‘제주에서 한 달 살기’도 가능하다니 언젠가 도전해 봐야겠다.

제주 여정을 마치고 광주로 향했다. ‘이야기꽃도서관’은 그림책을 특화한 유니버셜 디자인을 표방했다. 그날 열린 프랑스 작가 벵자맹쇼를 초청한 북콘서트에 200여 명 독자 각자 구입해온 책을 펼쳐 작가의 크로키와 비교하면서 감탄과 질문을 이어갔다. 도서관 관계자는 책 읽는 광주의 다양한 시민독서네트워크의 힘이라고 말했다. 9년 차에 접어든 ‘동네책방 숨’에서는 ‘평화도서관’을 지나 ‘필사책상’ 옆의 ‘광주의 책’ 코너에 섰다. 동네책방이기에 할 수 있는 관심과 배려의 서가. 부산의 6월과 제주의 ‘4·3’과 광주의 ‘5·18’이 현대사의 파노라마로 펼쳐져 내가 선 곳의 좌표를 확인케 했다. 여행지에서 만난 책을 모아 택배로 보내두고 책방을 나섰다. 나 먼저 가 있을 테니 너는 바람 속을 건너 천천히 내게 오라고.

도시재생 뉴딜지역으로 정비가 한창인 광주 동구의 ‘구도심’ 공유숙소 ‘신시瓦 한옥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가구전 윗길 공방이 있는 ‘쟁이길’에 자리한 ‘지음책방’에서 저녁을 먹었다. 옛집을 고쳐 엔틱숍, 독서모임 등도 여는 복합문화서점. 광주서점 네트워크와 함께 독자를 매개하는 책 문화 기획과 공방 플리마켓을 펼칠 계획이다.

여행자의 혼밥 메뉴는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제주 감귤 껍질을 잘게 썰어 넣어 상큼한 풍미가 일품인 ‘취나물파스타’와 이웃 ‘단청 공방’으로 자리를 옮겨 마련된 즉석 토론회가 코스였다. 책방지기와 주민, 독자, 여행자가 만나 도시재생에 주민의 삶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주제로 열린 사색의 밤은 ‘느린 서점 여행’의 최대 수확이었다.

새로 들어선 도시재생센터 옆에 얼마 전 무너뜨린 한옥이 있는 광주의 골목에서 생각한다. 도시재생 과제를 안고 있는 전국의 사정도 비슷할 터. 길을 떠나는 것도, 돌아오는 것도 사람. 자본과 속도에 떠밀려 부디 사람을, 스스로를 잃지 않길 바라며, 제주에서 담아 온 그림책 ‘사슴아, 내 형제야’를 소리내어 읽는다. ‘사슴아, 오랜 세월 할아버지와 그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앞에 나타나 아름다운 몸을 주었던 사슴아.(…) 숲의 신령과 강의 신령이 너를 보내주길 기원하며/사슴아, 나는 너를 부른다’. 파랑 넘어 가파도의 무채색 섬은 자전거포 어르신, 고양이, 청보리 색채로 풍성해지지 않던가….

시인·문화기획자 ·낭독서점시집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