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병원에 근무하는 대부분 의사는 환자가 복용 중인 약물의 종류와 수를 줄이느라 애를 먹는다. 일반적으로 하루 5가지 이상의 약제를 상시적으로 복용하는 경우를 다약제복용이라고 하는데, 이는 부작용 발생 가능성을 키우고 심지어 사망률도 높이기 때문이다. 약물 부작용 중에는 위염이나 위궤양, 빈혈, 백혈구 수의 감소, 간기능이나 신장기능의 악화, 졸림, 입 마름, 변비 등 다양한 증상이 있다. 특히 신경안정제 포함, 10가지 이상의 약물을 장기간 복용하면 치매 발병률이 3.3배나 는다는 보고도 있다.
윤종률(한림대) 교수팀이 국민보험공단의 코호트 자료(65세 이상 37만 명)를 토대로 2008년부터 6년간의 통계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매일 6가지 이상의 약을 복용하는 노인의 사망률은 30.8%로 그렇지 않는 노인 사망률(17.7%)보다 두 배 가까이 높았다. 어떤 약물은 같이 투여하면 약효 감소 또는 심한 상승과 같은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상호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 외국의 한 연구(Goldberg, 1996)에 의하면 두 가지 약제를 사용하면 10%, 4가지면 38%, 10가지면 거의 100%에서 상호작용이 나타난다.
이런 다약제 투약의 위험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환자들은 의사가 약을 줄이려 하면 심하게 항의한다. 약물의 알갱이 하나 하나를 헤아려 개수가 틀리다고 따지는가 하면, 같은 성분이라도 모양이나 색깔이 다르면 복용하던 약이 아니라고 분통을 터뜨리는 경우도 있다. 인지장애나 판단장애가 있는 환자들은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환자 보호자들이 같은 반응을 보일 때는 참 난처하다.
초기 고혈압이나 당뇨병을 운동이나 식이요법으로 치료해 보겠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좋은 현상이다. 투약 없이 섭생의 전환만으로 좋아진다면 구태여 약을 먹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질병의 정도가 심하면 우선 투약을 해야 한다. 또 질환의 경중에 관계없이 먹어야 하는 약도 있다. 20여 년 전 필자가 대학병원에서 심장수술에 종사할 때다. 인공판막 치환수술을 받은 40대 남자에게 항응고제를 매일 먹어야 한다고 했더니, 어떻게 평생 약을 먹느냐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 약이 건강을 지켜 줄 것”이라고 설득하니 그제야 수긍했다. 그런 그가 최근 6가지 이상의 약을 먹는다. 나이 들면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우리나라는 이미 65세 이상의 인구비율이 총인구의 14%가 넘는 고령사회이다. 노화현상 자체가 질병은 아니지만 나이가 들수록 고혈압, 당뇨, 골다공증, 동맥경화증 등 만성병에 다중 이환될 위험성이 많아지니 자연히 여러 가지 약을 복용하는 사람이 늘어난다. 2007년 국내의 한 연구팀이 만성 질환을 가진 노인들을 조사한 결과 매일 평균 7개의 약물을 복용하고 있었고, 최고 27개의 약을 먹는 환자도 있었다. 최근 필자가 근무하는 요양병원에 입원한 83세 김 할머니는 하루에 16가지, 총 37개의 알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아침식후에 먹는 약만 15알이나 됐으며 중복되는 약물도 3가지나 있었다. “어르신, 약이 너무 많아요!” 했더니 아플 때마다 여러 병·의원을 돌며 처방받은 약을 다 복용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분에게 꼭 필요한 약은 5가지 정도에 불과했다. 약물로 인한 부작용을 새로 생긴 질병으로 오인해 또 다른 약을 처방 받는 경우도 있다. 혈압약을 먹고 기침이 나면 감기로 오인하여 감기약을 추가하고, 이로 인해 변비가 오고, 변비약을 상복하다 보면 기존 콩팥질환이 나빠져 또 다른 약을 추가하는 식이다.
2012년 미국 노인병학회에서 제정한 비어기준(Beer’s criteria)에는 흔히 처방되는 53개의 약물이 노인들이 주의해야 할 ‘잠재적 부적절 약물’로 등록되어 있다. 한편 한국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도 2016년 한 해 건강보험을 청구한 65세 이상 노인 120만여 명의 자료를 이용해 노인의 건강에 위해가 될 수 있는 부적절한 처방 사례를 분석했다. 결과를 보면 ①부신피질호르몬제와 비스테로이드 진통소염제의 동시처방 ②파킨슨병에 흔히 쓰는 항콜린성 약물들의 동시처방 ③중추신경계 작용 약물들의 동시처방 등이 가장 많이 부작용을 유발했다. 이처럼 약물의 오·남용은 오히려 독이 된다. 하지만 약물요법은 노인의 급·만성 질환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데 가장 중요한 방법 중 하나이다. 성공적 약물 치료를 위해서는 의사들이 각종 약물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분석을 토대로 중복되는 약물을 피하고 환자 상태에 따라 적절하게 처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환자들이 어떤 증상을 호소할 때 그것이 혹 복용 중인 약물의 부작용이 아닌지 먼저 검토해 부적절한 약을 빼는 것이 우선이다. 요양병원 입원 환자나 보호자들이, 환자가 복용하고 있는 부적절한 약물을 줄이고자 애쓰는 의사들의 노력과 고충을 충분히 헤아려 주었으면 좋겠다.
의사·수필가·온천사랑의요양병원 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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