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가까운 지인의 중학생 아들이 느닷없이 운동선수가 되겠다는 뜻을 밝혀 부모를 깜짝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 덩치에 비해 평소 운동에 관심이 거의 없는 아이였던지라 부모는 그런 결심을 한 배경이 의아했다고 한다. 그런데 진의를 파악한 뒤 박장대소할 수밖에 없었다.

담당 교사는 주저하는 아이에게 만약 가입을 하게 되면 연습 후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게 해준다는 달콤한 추파를 던졌던 모양. 한창 먹성이 좋을 때라 금방 뭘 입에 넣고도 돌아서면 배가 고팠을 남자 중학생은 그 꾐(?)에 넘어가 느닷없이 폭탄선언을 하게 된 셈이다. 어렴풋이나마 운동선수의 고충을 알고 있었던 부모의 설득에다 애초 이 분야와는 거리가 멀었던 아들의 성향 탓에 일은 흐지부지 끝났다.

그때 그 아이가 교사의 권유를 받아들였다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라는 상상을 가끔 해본다.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내로라하는 선수로 이름을 날릴 수도 있었을 터다. 아님 부모의 걱정대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도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한 채 중도탈락하는 신세가 됐을지도 모른다.

어느 종목이든 운동선수로 대성하기란 참 힘들다. 우선 특출한 재능이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뒷받침해줄 경제력 등 주위의 도움 역시 필요하다. 치명적인 부상이라도 당하면 꿈을 포기해야 하는 위기와 맞닥뜨리게 된다. 이런 까닭에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정상에 오른 운동선수들에게는 사람들의 찬사가 쏟아진다. 그동안 그들이 흘린 땀방울의 가치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다.

불굴의 정신으로 무장한 선수들이 펼치는 승부의 세계는 많은 이에게 감동을 준다. 때로는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비통한 눈물을 자아내도록 만들기도 한다. 그랬던 우리나라 체육계가 바람 앞에 등불 신세가 됐다.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추악한 일이 잇달아 터지고부터다.

쳬육계에 체벌을 비롯한 여러 가지 병폐가 존재하다는 것은 어제오늘 알려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사태가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범죄 가운데서도 죄질이 아주 나쁘다는 성폭력이 만연하고 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여자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의 ‘미투(#MeToo)’ 폭로 이후 비슷한 피해를 호소하는 목소리가 종목을 가리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소수 지도자 일탈로만 여겨졌으나 웬걸,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세상에 이런 복마전이 있을까 싶다. 이번 일은 학연과 같은 파벌로 뭉쳐진 체육계 특성과 성적지상주의에 매몰된 우리나라의 엘리트 체육 정책이 빚어낸 참사임이 분명하다. 피해 선수들은 억울함을 호소하려 해도 기득권 세력에 찍혀 앞길이 막힐까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훈련 과정 중 어떤 폭력과 파렴치한 범죄가 저질러져도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만 하면 모든 것이 덮어지니 감독 기관 역시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무책임한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이쯤 되면 관련 단체의 자정노력이라도 있어야 하건만 언감생심이다. 파문이 일파만파로 확산되자 대한체육회가 부랴부랴 대책을 발표하기는 했다. 가해자 영구 제명과 스포츠 인권 강화 등이 핵심이다. 그렇지만 사회는 ‘일단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는 심사라며 싸늘한 시선을 보낸다. 하긴 숱한 비리가 터져도 솜방망이 징계와 변명으로 일관하던 전례로 비춰볼 때 ‘제 식구 챙기기’에 급급하던 체육회가 하루아침에 변하리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 모른다. 결속력이 강하기로 소문난 몇몇 개별 종목 단체에서야 더 말할 나위조차 없다.

보다 못한 정부와 정치권이 사태 해결에 나섰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교육부, 여성가족부는 얼마 전 공동협의체 구성에 합의했고 국가인권위원회는 ‘스포츠인권특별조사단’을 꾸리기로 했다. 엘리트 체육의 폐해 근절을 위해 대한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를 분리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과 정부는 당정협의회에서 체육계 성폭력 재발 방지 관련 법안을 빠른 시일 내 처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체육계 구조조정 검토를 지시한 바 있다.

그러나 엄격한 제도 시행에 앞서 선행돼야 할 것은 뼈를 깎는 내부 반성과 자각이다. 체육계는 그동안 틈만 나면 ‘한국은 세계 10대 스포츠 강국’이라 목소리를 높였다. 이게 뜬구름 잡는 소리라는 것은 이제 누구나 다 안다. 지도자가 선수들을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라 구타를 해도 괜찮고, 성폭력을 자행해도 무방한 대상으로만 인식한다면 국제대회에서의 호성적은 빛 좋은 개살구나 다름없다. 체육계에 물어본다. 운동선수 딸을 둔 부모가 자식의 재능 부족 때문이 아니라 좋지 않은 일을 당할까 두려워 밤잠을 설치는 게 과연 정상적인 사회인지를.

논설위원 haore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