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이승우 선수께. 가을에 서리가 내리면 숲의 나무들은 시들게 마련입니다. 일이 어렵고 쉬운 것은 작고 큰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를 아는 데 있습니다. 현자(賢者)가 때를 만나지 못하면 깊은 곳에 은거하는 것도 이 때문이에요. 제 말이 아닙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명재상 관중이 남긴 명언입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때를 안다는 게 보통 일입니까. 실천하기가 쉽지 않아요. 여기에다 참고 기다리라니. 관중 정도 되면 모를까 우리 같은 범인(凡人)이 흉내 내다가는 갑갑증에 복장 터져 죽을 지경일 겁니다. 좀 참다가 제 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겠지요. 상대가 강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망한다는 말이 괜히 나왔겠습니까.

관중 얘기를 좀 더 해볼까요. 춘추전국시대는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암흑기였습니다. 그 정글 같은 시대에 제나라 환공을 중원의 첫 패자로 만들었던 인물이 관중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최고의 킹메이커였습니다. 이런 관중을 제갈공명과 함께 중국의 2대 재상이라고 합니다. 그는 모시던 왕자 규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자, 충고한 말이 ‘때를 기다리자’였습니다. 왕자 규는 관중과 함께 이웃 나라로 유배를 갔지만, 훗날 왕위에 오르지 못했어요. 동생이자 라이벌인 환공과 권력 다툼을 벌이다 패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때 관중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왕자 규 대신 왕위에 오른 환공을 택해 재상에 올랐습니다. 물론 친구 포숙의 천거가 있어 가능했던 일입니다. 포숙은 환공의 오른팔이었거든요. 친구 잘 둔 덕을 많이 본 것입니다. 주군을 바꾼 관중은 또 다른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은 어리석은 자들의 생각이다. 진정한 신하는 주군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섬기는 것이다.” 그는 환공을 도와 제나라를 부국으로 만들었고, 그 덕에 명재상이란 명성을 얻었습니다. 결국 ‘때를 알고 기다려야 한다’는 말은 관중 자신에게 한 다짐이었던 것 같아요.

그로부터 2000년가량 지났을 때 명나라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는 도광양회(韜光養晦)라는 말이 나옵니다. ‘자신의 재능을 숨기고 인내하며 때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유비가 스스로를 낮추어 조조의 식객으로 머물면서 그의 경계심을 약화시키고, 때를 기다렸던 것에서 유래됐습니다. 약자에게 모욕을 참고 견디면서 힘을 갈고닦으라고 조언을 할 때 자주 인용되는 말입니다.

나이가 쉰 중반쯤 되니 이런 말들이 귀에 속속 들어옵니다. 이마에 주름살이 좀 생길 만큼 세파에 시달렸다는 말이겠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옛 어른들의 말은 별로 틀린 게 없습니다. 학교 졸업 후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때 부모님께서 흔히 하는 말이 있잖아요. “튀지 마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저희 세대는 한 번쯤 들어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절에는 이 말이 그렇게 가슴에 와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약한 자의, 용기 없는 자의, 현실에 굴복한 자의 변명으로 여겨졌습니다. 질서는 지키는 것보다 바꾸는 것이라고 믿었거든요. 팀워크를 깨는 캐릭터가 얼마나 큰 결격사유인지도 몰랐던 시절이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매운맛을 톡톡히 보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서른 중반에 겪었던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는 무한 경쟁으로 내모는 현실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게 하더군요. 적어도 정은 맞지 말아야 한다는, 일단 살고봐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현실과 접점을 찾으며 철 들어갔습니다.

이승우 선수, 지난 16일 중국과의 아시안컵 경기 후 논란은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라며 자신만만했던 청년 시절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이승우 선수는 경기에 교체 투입되지 않자 물병과 수건을 걷어차며 불만을 토로했다고 하더군요. 파울루 벤투 대표팀 감독이 지켜보는데도 정강이 보호대까지 벤치에 내던졌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이 일로 시건방지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를 당돌한 행동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열정과 도전 정신으로 포장도 하면서. 스물 즈음의 청년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 이런 게 아니겠어요. 선수라면 경기에 뛰고 싶은 게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거친 표현으로 강하게 어필했으면 그에 따르는 대가는 받아야 합니다. 이제부터 경기에서 조그만 실수라도 해 보세요. 당장 “겉멋만 들어가지고”라는 말이 나올 겁니다. 이런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면 건방을 떤 만큼 실력을 갖춰야 합니다. 조직 융합을 깬다는 소리도 들으면 안 됩니다. 이 역시 실력입니다. 그렇게 조금씩 깨지고 부딛히면서 세상을 알아가는 것 같아요.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인내와 노력으로 지금의 아픔을 견뎌내고 극복해 큰 선수로 성장하길 기대합니다.

논설위원 sbj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