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1000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칠천량 해전의 참패로 풍전등화에 놓인 상황을 극적으로 바꾼 명량해전에 앞서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 적은 내용이다. 아마 그때 명량의 바닷길이 열렸다면 조선은 순식간에 무너졌으리라. 이렇게 지켰던 바다는 1966년 조선산업으로 다시 꽃을 피웠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삼면이 바다잖소. 여기서 살길을 찾아야지요”라고 역설한 데 대한 응답이었다. 경제개발계획의 그림은 중화학공업 육성이며, 그중 첫째가 ‘조선입국’이었다. 바다를 통한 근대화의 미래를 본 것이다. 외화가득률 1위에 고용창출 및 파급률이 큰 조선산업. 많은 사람이 머리를 짜내고, 셀 수 없는 밤을 새웠다. 30년 각고의 노력 끝에 2000년 세계 1위에 올랐다.

조선은 타 산업과 차이점이 제법 있다. 조선시장은 단일 시장이라 생존게임이고 서열만이 존재한다. 수주가 경쟁 결과다. 무엇보다 세계경제에 연동하는 경기순환형 시장이다. 경기의 부침이 있으며, 어느 정도 선행지표를 통해 예측 가능하다.

조선은 자본 집약, 노동 집약, 기술 집약 산업이어서 진입장벽이 높다. 조선소를 만들려면 수천 억에서 수조 원까지 든다. 직원도 수천 명에서 수만 명이 필요하다. 배는 곡면이 많고 설치 공간의 제약 등으로 자동화에 한계가 있다. 배를 만드는 기술도 강재 절단, 용접, 장치, 자동제어, 자동항해, 무선통신, 재난방지 기술, 환경관리 제어기술 등 단순기술에서 고도의 기술까지 총망라하고 있다. 이 때문에 기술 인력이 한 번 빠지면 회복하는 데 많은 시간과 돈이 든다.

우리가 추월을 걱정하는 중국은 어떨까. 시장점유율 40%로 세계 1위가 목표인 중국의 경우 민간부문은 과잉설비에 대한 구조조정을 하고, 국영조선소는 합병을 통해 구조개선을 할 계획이다. 그림자는 있다. 싼 인건비의 강점이 희석되고, 원가계산의 불확실성도 커 보인다. 고급인력도 이탈하고 있다. 선박 품질의 수준은 더 문제다. LNG운반선은 건조 후 2년 만에 폐선한 경우도 있고, 중고선박은 한국산 대비 20% 이상 낮은 가격으로 거래된다. 그래도 여전히 조선 굴기 의지와 국가의 전폭적 지원으로 범용선종에서는 최고 경쟁력을 지닌다.

일본은 중국보다 더 위협적이다. 조선해양산업의 1위 재탈환을 위한 실효적 방안을 현실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자체 설계능력 강화와 인재 양성, 정부의 금융 및 정책 지원, 자국선사와의 협력 등이 주 골자다. 정관계, 금융계, 선주사, 조선소, 기자재업계가 힘을 합쳐 타도 한국을 외치고 있다. 연간 총 수주량 기준, 세계 2위가 된 이마바리조선소는 조용히 칼끝을 한국을 겨누고 있다.

EU는 실속이 있다. 호화 크루즈선은 아직 유럽이 최고다. 해양환경 관련 규정과 기술, 장비개발도 한중일보다 앞서 부가가치 있는 알맹이는 꼭 쥐고 있다. 조선과 해양의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조선해양의 흐름을 리드하고 있다. 무엇보다 생존을 위한 협업과 M&A 등으로 장비 제작사들의 국적이 없어진 지 오래다.

초호황기를 구가하던 한국 조선은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촉발된 세계경제위기탓에 물동량이 감소해 이미 발주한 선박마저 인도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해졌다. 일감이 급감하기 시작할 즈음 유가가 100달러대로 오르며 해양플랜트 사업이 대거 몰려왔다. 기당 수주가격이 5억~40억 달러까지 치솟자 사운을 걸고 너도나도 덤볐다. 해양플랜트는 설계의 양과 질이 선박 대비 5배 이상이다. 조선소 및 협력사의 인력은 사상 최대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2014년부터 유가가 떨어지며 30달러까지 추락, 조선소는 심각한 상황에 봉착했다. 준비 없는 욕심과 기록적인 수주의 유혹으로 인한 처참한 대가였다. 결국 중소조선소는 거의 문을 닫았고, 국내 빅3 조선소는 살을 도려내는 생존의 몸부림으로 버텨내고 있다.

시장의 변동은 계절의 변화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사계절 변화를 탓할 수 없듯이 경기 변동을 탓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기업의 리더는 그렇다. 세계경제는 갈수록 불확실성과 역동성, 그리고 연관성이 커지고 있다. 조선산업 자체가 세계시장을 상대로 하고 있으니 세계를 향한 유연성, 민첩성, 콜라보의 정신은 더욱 중요하다.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의 특성을 십분 이용해 명량해전에서 사즉생의 의지로 승리했듯이 글로벌 환경이 이보다 더 혹독할지라도 우리의 강점을 살려 싸워 이길 수 있는 준비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낸다면 바다에서 살 길을 찾는 우리의 손을 다시 한번 들어주리라 믿는다.

전 대우조선해양 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