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유력 정치인의 성폭력 혐의에 대한 형사재판이 진행 중이다. 비서였던 이에게 자신의 우월한 지위에 입각하여 불법적인 성적 행위를 했느냐 여부가 다퉈지고 있는데, 1심에서는 업무상 위력이 존재하긴 했으나 행사되진 않았다는 판단으로 무죄가 선고된 바 있다. 처음으로 피고인 신문이 행해진 항소심은 주로 비공개로 진행되어 결심재판까지 마쳤으며 다음 달 1일 선고만을 앞두고 있다.
종래와 달리 업무상 위력의 존재 자체와 위력의 행사를 구분하여 단계별로 둘 모두를 범죄성립을 위한 요건으로 내세운 법적 논증에 대한 논의도 물론 있지만 그와 별도로, 많은 다른 사건에서처럼, 잠정적이긴 하나 일단 내려진 법적 결론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은 크게 찬성과 반대 두 가지로 갈린다.

주목할 만한 것은, 당사자 간의 관계를 보는 시각의 차이가 그 주된 이유인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즉 1심의 결론에 찬동하는 이들은 해당 건은 당사자 둘 간의 사적 문제이지 범죄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고, 반대하는 이들은 그와 같은 권력구도를 법원이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당사자들이 놓인 환경을 감안하고 당사자들의 관계 및 그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최대한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법적 판단에서 마땅히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1심 결과에 수긍하는 입장의 사람들 및 1심 재판부는 그 점에 있어 자신이 있는 것이겠지만, 충분하지 않다고 보는 입장이 있는 것 역시 사실이며 그 때문에 항소심이 진행되고 있기도 하다.

다만 1심을 둘러싼 논의에서도 그러하고 2심에 대한 기대와 요청에 있어서도 권력관계에 대한 좀 더 적절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주문만이 반복되고 있는데, 정작 중요한 얘기는 별로 하지 않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기실 재판은 어느 쪽 당사자에게 있어서건 상당한 부담이 따르는 힘겨운 과정이고 그에 적합한 준비와 대응이 요청된다. 피고인으로 선 자는 기존의 법적 장치에 최대한 기대어 자신을 방어할 수밖에 없겠지만, 결코 파악하기 쉽지 않은 사건을 법적으로 다루고자 하거나 사건의 배경이 된 당사자 간 관계가 달랐기를 희망하는 이들이라면, 법이 현명한 판단을 내려줄 것이라 그저 믿고 기다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정당한 삶의 요구를 법에게 제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법이 자체의 논리에 따라 하던 대로 운용되게 방치할 것이 아니라 이제껏 법이 예상해 온 것뿐만 아니라 아직 법이 알지 못하고 있거나 알고도 묵인했던 것을 얘기함으로써 법이 세상살이에 직면하도록 해야 한다. 요컨대 법적 절차와 관행 및 법률가라는 매개장치로 걸러지지 않는, 사람 간의 정당한 관계에 대한 갈망과 그에 대한 확신 등 삶의 비전을 직접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아직 오지 않은 법을 표현해야 한다.

그러할 때 어쩌면 법은 과거의 틀을 내세워, 다가올 법을 저지하거나 그 도래를 회피하고자 할 것이다. 그렇지만 더 많은 사람이 더 확고하게 지위 차이가 있든 친밀한 사이든 어떠하든 간에 인간관계 자체의 위계성과 일방성을 용납하지 않게 된다면, 아니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고 또 그리 산다면, 법 역시 세상에 터를 잡을 수밖에 없는 까닭에 다른 법, 달라진 법은 어느 순간 기필코 우리에게 닿을 것이다. 작금의 재판은 리오타르의 말마따나 그런 미래가 이미 현재에 있음을 말해주는 징표일 것이다.

“세계를 바꿔야 한다면 그 이유는 다른 것을 향한 열망이 세계 속에 있기 때문이요, 세계에 부족한 그것이 이미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가 바뀌어야 한다면 그 이유는 세계가 이미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예고하고 내다보고 촉구하는 뭔가가 현재에 있기 때문이에요. 인류는 아직 인류가 아닌 것, 자신이 막연하게나마 장차 되고자 애쓰는 바로 그것이기도 합니다.”(장-프랑수아 리오타르, ‘리오타르, 왜 철학을 하는가?’, 북노마드)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