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호찌민을 여행한 이들은 대체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관광시설로 ‘베트남 전쟁박물관’을 꼽는다. 이곳은 1975년 베트남전이 끝난 뒤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하기 위해 설립됐다. 전쟁박물관인 만큼 모든 전시물이 어두운 기억을 간직하고 있지만, 고엽제 관련 전시물이 특히 참혹하다. 포르말린 병에 든 사산 기형아, 하마 입처럼 코 부위가 툭 튀어나온 불구자의 사진 등등. 고엽제 전시물을 보노라면 전쟁의 참상이 판화처럼 가슴에 새겨진다. 고엽제 후유증을 앓는 베트남인이 200만 명에 이른다니, 고엽제를 살포한 미국에 대한 원망이 깊은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베트남 정부는 1995년 미국과 수교하기 전까지 이 박물관을 ‘미국 전쟁범죄 박물관’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런 적대도 옛일이다. 2001년 12월 미국과 베트남 간 무역협정이 발효된 뒤 양국의 교역이 급증하면서 미국은 베트남의 제2 수출시장으로 자리잡았다. 2016년 베트남은 미국의 마지막 제재라고 할 수 있는 무기금수에서도 벗어났다. 지난해 3월 미 태평양함대 소속 핵 추진 항공모함인 칼빈슨호가 종전 43년 만에 처음으로 베트남 다낭에 입항하는 등 양국은 경제 교류뿐만 아니라 안보 협력도 도모하고 있다. 실로 상전벽해 같은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미국과 베트남의 관계 개선은 비핵화·평화협상에 나선 북한과 미국이 추구해야 할 본보기로 거론된다. 지난해 7월 베트남을 방문한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베트남 국민의 근면성과 결합한 미국과의 새로운 유대, 견실한 리더십이 베트남을 오늘날의 성공 스토리로 이끌었다”며 북한에 ‘베트남의 길’을 걸으라고 권고한 바 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들어서도 ‘경제 올인’을 거듭 선언한 북한에겐 솔깃한 제안이 될 법하다. 1986년 774.7%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겪었던 베트남이 ‘도이머이’란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한 뒤 안정을 되찾아 매년 6%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는 등 급속한 발전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을 내달 중순 베트남에서 열자고 북한에 제안했다고 일본 요미우리신문이 보도했다. 성사될 경우, 베트남이란 장소가 가진 상징성만으로도 회담의 성과를 기대할 만하다. 미국과 미증유의 피해를 낳은 전쟁을 치르고도 종전 20년 만에 화해한 나라여서다. 베트남이 한반도 평화의 거울로 다가오고 있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