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왜 만주로 가신 거예요?”

“증조할아버지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원한을 산 일은 없었어요?”

“할아버지 셋째 형님은 왜 중공군에 입대했나요?”

지난달 막내 손자는 캠코더를 켜 놓은 채 아흔셋의 할아버지와 열흘 넘게 인터뷰에 매달렸다. 귀가 어두운 할아버지 탓에 손자의 목소리는 자못 컸다. 할아버지에 대한 인터뷰는 손자의 오랜 희망사항이었다. 이제 집을 떠나야 할 때가 임박해지자 손자는 서둘러 사전조사와 준비 끝에 할아버지와의 인터뷰를 진행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어르신처럼 손자의 할아버지도 이북 출신이다. 함경북도 길주가 고향이지만 나라가 망하자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만주 용정 부근으로 개척 이민을 떠났고 집안은 약간의 재산을 지닌 부농으로 성장했다.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할아버지는 일제 패망 후 용정에 있는 중학교를 다니며 대학 진학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1946년 겨울 할아버지의 인생이 뒤바뀌는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자신의 아버지가 지주라는 이유로 인민재판에서 처형당한 것이다. 처형을 집행한 자는 당시 소작을 짓던 먼 사돈집 청년이었다.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한밤중에 형들과 함께 아버지의 시신을 언 땅에 묻은 후 할아버지는 회령을 거쳐 북한 청진으로 도망쳤다.

이후 평양과 원산 등지를 오가다 지인의 도움으로 북한의 수의전문학교에 다니던 할아버지의 인생에 또 한 번 큰 사건이 터졌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졸업 후 양양 가축병원 근무를 배정 받았으나 전쟁 통에 후퇴하는 인민군과 피란행렬을 따라 걸어서 9일 만에 길주에 와 있던 어머니를 뵈었다. 길주에서 몇몇 젊은이가 모여 길주반공청년회를 조직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어머니께 나흘이나 닷새 후면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할아버지는 맏형이랑 장조카와 함께 성진항에서 LST 조치원호에 승선하였다. 구룡포에 도착한 후에는 전투 부대에 배속되어 전쟁에 참가했다. 대관령과 설악산 등지에서 수색부대로 활동하다 부상으로 부산 제15육군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만주 길림성에서 살았던 20대 청년이 한반도의 최남단 부산까지 흘러들어온 연유이다. 부산에서 헤어졌던 맏형과 장조카를 다시 찾았고, 삼십대 초 부산 대신동 토박이 어여쁜 신부를 만나 단란한 가정을 꾸려 육십 평생을 사셨다.

할아버지가 중국의 친척들과 다시 연락이 닿은 것은 1980년대 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셋째 형님과 연락이 닿았지만 만나기 직전 형님은 세상을 떠났다. 48년 만에 고향을 다시 찾은 할아버지는 조카로부터 어머니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당신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에 가슴을 쳤다. 많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의 기억은 놀랄 만큼 또렷했다. 연도와 지명은 물론 인명까지 정확하게 기억을 하고 있었다.

인터뷰 도중 할아버지는 가끔 복받치듯 눈물을 흘렸다. 젊은 시절 자신의 몸뚱이 하나로 버텨 온 벅찬 세월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 간간이 오래된 사진첩을 들여다보기도 하였다. 긴 인터뷰가 끝나자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수십 년 가슴에 담아두었던 사연을 들어줘서 고맙다고 했다.

여러 개로 나뉜 영상 파일을 열었을 때 처음에는 단지 소설보다 더 기막힌 개인의 인생사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개인의 경험이나 기록이 아니었다. 이야기의 전개도 극적이었지만 북쪽지방과 간도의 풍습과 제도, 해방 후 연변지역에 몰아친 격변, 전쟁 전 북한의 상황과 남한에 대한 인식 등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일들이 너무도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나라의 패망과 개척이민, 식민 지배의 고통, 전쟁과 생존을 건 투쟁이 배어 있었고, 나라가 백성을 지켜주지 못할 때 백성이 어떤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이야기였다.

이 땅에는 아직도 많은 할아버지가 자기만의 이야기를 품고 생존해 계신다. 그들은 남과 북에서, 만주와 일본에서 각자 혹독한 세월을 견디며 현대사를 지켜왔다. 그저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친 이야기일지라도 한 분 한 분의 처절한 경험은 우리에겐 살아 있는 귀중한 역사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책에서 배운 역사만이 역사가 아닐 것이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역사 교과서에 단 몇 줄로 요약되어 있는 역사적 사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내포한다. 이 땅의 할아버지들의 수많은 이야기가 기록되어야만 하는 이유이다.

동서대 영어학과 교수·민석도서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