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월남이라 불렀던 베트남을 알게 된 건 어릴 적이다. 누나들은 초등학생 동생들을 무릎에 앉힌 채 ‘맹호들은 간다’ ‘우리는 청룡이다’는 등의 노래를 가르쳐줬다. 지금도 그 군가의 1절쯤은 생생하게 떠오른다.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당시 한 동네 살던 20대 형들도 제법 많이 베트남으로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교에서는 저학년들에게도 위문편지를 쓰도록 했다. 머리말은 예외 없이 ‘파월장병 아저씨, 무더운 날씨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로 시작됐다. ‘따이한(대한·大韓)’ 군인들의 용맹한 활약상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학창 시절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한국과 베트남은 지리적으로 꽤 떨어졌으나 비슷한 점도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열강으로부터 식민지 고통을 강요당했고 독립 이후에는 좌우 이념에 따라 남북이 갈라지는 비극을 함께 겪었다. 동족 간 분쟁도 치러야 했다. 그러나 두 나라의 관계는 이런 공통점에서 분모를 찾기 보다는 악연으로 이어졌다고 규정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1964년 우리나라가 베트남전에 참전한 이후 1973년 철군을 거쳐 1992년 수교가 될 때까지 양국은 적대관계였다. 자국이 전쟁터였던 베트남의 피해도 컸지만 파월 장병 희생도 적지 않았다.

그런 암울했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는 누구도 더 이상 베트남을 총부리를 맞댔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경제와 정치,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2015년 양국 간 FTA(자유무역협정) 발효 이후 베트남은 우리나라의 아세안 제1위 교역국가가 됐다. 또 한국은 ‘포스트 차이나’란 명성 속에 최근 고속 성장을 하고 있는 베트남의 최대 투자국이기도 하다. 베트남에 부는 한류 열풍 역시 상상을 초월한다.

베트남인들이 우리 사회에 녹아든 지도 오래다. 특히 다문화 결혼이 보편화되면서 베트남 여성의 이주가 늘고 있다. 통계청 조사 결과, 2017년 우리나라 남성과 결혼한 외국인 여성의 국적은 베트남이 27.7%로 가장 많았다. 이전까지는 중국인 여성이 압도적이었지만 2016년 이후 베트남과 순위가 뒤바뀌었다. 관광교류 확대 역시 눈여겨볼 만하다. 지난해 11월까지 베트남을 찾은 한국인은 316만 명, 한국을 방문한 베트남인은 42만7000여 명으로 집계됐다.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각각 46.5%, 42%가 늘었다.

그러나 이 같은 수치만으로 양국 관계가 돈독하다고 평가하는 건 아직 무리라는 지적도 나온다. 두 나라 사이에는 여전히 껄끄러운 부분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게 우리나라의 베트남전 참전과 관련한 입장 표명이다. 지난해 3월 베트남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당시 쩐 다이 꽝 베트남 국가주석과 가진 정상회담에서 “우리 마음에 남아있는 양국 간 불행한 역사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한다”고 말했다.

베트남 국가주석은 이에 대해 한국 정부의 진심을 높이 평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지 언론은 문 대통령의 발언이 공식사과인지를 두고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베트남에서는 여전히 ‘한국군의 양민학살 논란’이 꼭 매듭지어야 할 숙제로 거론된다. 베트남의 한 마을에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남한 군대가 저지른 죄악을 우리는 영원토록 뼛속 깊이 새기고…’란 문구가 새겨진 한국군 증오비가 있을 정도다.

더 우려되는 바는 이런 정치적 사안 외에 민간교류 부문에서도 한국에 대한 베트남의 부정적 정서가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여러 여론조사를 보면 베트남인들은 대체로 한국에 호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한국인과 결혼한 일부 베트남 여성이 겪는 비정상적 대우와 한국 기업의 자국 근로자 차별 등에는 분노를 감추지 않는다. 한국군 참전이나 양민학살 의혹 같은 과거사보다 현재의 이런 멸시 풍조를 더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이야기다.

지난달 베트남의 2018년 아세안축구선수권대회(스즈키컵) 우승으로 ‘박항서 열풍’이 불면서 양국은 유례가 없었던 밀월관계를 갖게 됐다. 정부조차 못한 일을 이뤄냈으니 이 만큼 훌륭한 민간외교관이 다시 나타날 수 있을지 궁금할 따름이다. 박 감독 덕분에 두 나라에서는 “우리는 형제국”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그게 맞다면 다투기는 할지언정 의절해서는 안 되는 게 형제관계다.

새 해에는 모두가 희망을 가져야 할 때. 당시의 국제상황이야 어찌 됐던 지금 베트남과의 우호 지속이 우리나라가 과거 그 나라에 남겨줬던 상처를 조금이나마 치유해주는 길이 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을 터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일원이 된 ‘베트남댁’뿐 아니라 모든 이주민의 눈에서 더는 눈물이 흐르지 않게 되길.

논설위원 haore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