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동양의 선각자 중에는 의사가 많다. 근대화는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국가 발전의 기틀을 구축하는 과정이었고, 그 핵심이 사람 목숨과 관련된 의술이라고 판단했던 까닭이다. 이들은 서양 의술을 배워 사람을 치료하다 사회를 개조하는 혁명가로 변신한다.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 의학을 받아들인 서재필(1864~1951)이 대표적인 예다. 1884년 김옥균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해 일본으로 피신한 그는 이듬해 미국으로 망명한다. 그는 1889년 조지워싱턴대학 의대에 들어가 세균학을 전공했다. 의사로 일하다 조국을 떠난 지 10년 만에 귀국한 그는 1896년 ‘독립신문’을 창간해 민중 계몽에 나선다. 치료 대상을 사람에서 사회로 확대한 것이다.

민족·민권·민생의 삼민주의를 기반으로 공화제를 창시한 중국의 ‘국부’ 쑨원(1866~1925)의 원래 직업도 의사였다. 하와이에서 신교계 고교에 다니며 서양 문물에 눈을 뜬 그는 18세 때 홍콩으로 이주해 서의서원이란 의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 개업의로 활동하던 그는 마카오에서 쫓겨난 뒤부터 본격적으로 혁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중국 근대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루쉰(1881~1936) 역시 의학도로 출발했다. 난징의 해군학교와 철도학교에서 신학문을 접한 그는 1902년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센다이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수강 도중 중국인이 처형되는 영화를 보고선 진로를 의학에서 문학으로 바꿨다. 의사로 살아가기엔 당시 민족의 현실이 너무 급박하고 엄중하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지난 21일 우리나라에서 의사 자격증을 딴 남수단 청년 토머스 타반 아콧(34)에게서도 이런 한중 선각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남수단의 오지 톤즈에서 의료·교육 봉사활동을 하다 2010년 암으로 선종한 고 이태석 신부의 도움으로 한국에 유학와 2012년 이 신부의 모교인 인제대 의대에 진학했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 한국말을 전혀 몰랐던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유학 9년 만에 당당히 의사 이론·실기시험을 통과했다.

토머스의 꿈은 외과 전문의가 되는 것이다. 내년부터 인제대 부속 부산백병원에서 인턴 과정을 밟는다. “수단에는 외과 의사가 많지 않다. 이태석 신부님의 정신과 토머스 정신을 합쳐서 할 수 있는 데까지 봉사하겠다.” 반드시 그 꿈을 이뤄 내전으로 고통받는 남수단 사람들의 희망으로 성장하길 기원한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