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 2일 밤 부산 다대포 국제여객터미널에서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부산아시안게임 북한응원단이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이날 여자축구의 대일본전 승리를 자축하는 군무를 벌인 것이다. 만경봉-92호를 배경으로 고층 아파트의 불빛을 조명 삼아 춤추는 모습이 신기했던지 주민들은 선착장 가까이 몰려와 함께 손뼉을 쳤다. 짙은 화장에 미소를 머금고 일사불란한 응원전을 선보인 북한 미녀응원단은 세간의 화제였다.

‘미녀들’ 못지 않게 인상적이었던 건 응원단과 대조적인 남성 인솔자와 관계자들이었다. 국제법상 북한 땅인 만경봉호와 남한 땅인 다대항을 들락거릴 때마다 상기되고 딱딱하게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자유분방한 복장과 거침없는 언행으로 그들에게 시선을 꽂고 있던 시민들 때문에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불그레한 얼굴을 보고 “저 사람들 술 되게 좋아하나 보다”고 수군거리던 사람도 있었다. 만경봉호가 정박한 지 10여 일 지났을 무렵 부산시 등 관계자들이 몇 차례 선상 오찬을 가진 적이 있다. 한 번은 만찬 참석 인사 중 한 명이 배에서 내리는데 연신 콧노래를 부르고 덩실덩실 춤까지 추고 있었다. “기자들 보면 큰 일 난다”며 수행직원이 당황해 했지만 웬일인지 그 모습이 주책스럽지 않았다. 그날 만찬에서 남북 인사들이 폭탄주로 ‘러브샷’을 했다는 소리를 듣고 왠지 오히려 안심이 됐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연내 서울 답방은 사실상 어려워진 것 같다. 청와대 대변인도 서두르거나 재촉할 의사가 없다고 밝히고 있고 북미 간 기싸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남북관계에서 새로운 합의를 도출하기가 힘든 점 등도 그런 관측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여전히 김정은의 답방 문제는 우리 내부를 내연시키고 있다.

김정은 답방을 반대해 거의 매주 열리는 서울역 광장 태극기 집회에서는 김정은 사진을 태우는 화형식이 진행되고, 그 옆에서는 한반도기를 흔들며 환영 행사를 갖고 있다. 연예인 김제동이 진행하는 KBS 프로그램에서 ‘위인맞이환영단’ 대표 인터뷰를 여과없이 내보냈다고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사람은 앞서 “나는 공산당이 좋아요”라고 외쳐 물의를 빚었던 터라 더 논쟁거리였다.

김정은의 답방은 찬성하든 반대하든 만약 이뤄지기만 하면 6·25전쟁 이후 한반도 최대 사건인 것은 틀림없다. 이미 세 사람의 대한민국 대통령이 방북한 만큼 양 정상 간에 처음으로 교환 방문이 이뤄지는 것이다. 이 의미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2000년 제1차 남북 정상회담 막후에서 역할을 했던 임동원 전 국정원장의 회고록 ‘피스메이커’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서울 방문을 권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김 위원장하고 다른 것이 있다면 나이를 좀 더 먹은 건데…. 나이 많은 내가 먼저 평양에 왔는데 김 위원장께서 서울에 안 오면 되겠습니까….” 김정일은 서울 방문을 약속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김일성은 6·25전쟁 때 몇 차례 서울에 왔다 간 것으로만 알려졌다. 우리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는 게 예방이 아니듯 방한을 요청하는 게 간청이 아니다. 역사 앞에서 겸허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하지 못한 서울 방문을 김정은이 실행한다면 그 자체로 역사에서의 한 발 전진일 것이다.

베를린 장벽 붕괴 전 세계적 냉전의 최전선은 남북한이 아닌 서독과 동독이었다.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군 수백만 명이 송곳의 끝처럼 동서독 국경선을 중심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통독 전 양측은 7번의 정상회담을 가졌고 그 중 4번은 서독에서 열렸다. 동독의 최고지도자가 서독을 네 번이나 방문한 건 우리와 다르지만 국민들의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1987년 9월 동독 에리히 호네커 서기장이 처음으로 서독의 당시 수도 본에 왔을 때 격렬한 반대시위에 곤욕을 치렀다. 양 정상의 연설을 현지에 생중계하는 문제로 회담이 무산될 뻔 하기도 했다. 하지만 통일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왔다. 2년 뒤 베를린장벽이 무너졌고 1년 뒤엔 통일이 되었다.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김정은의 방문은 반가울 리 없다.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이 우리 민족사 최대 비극이고 그 때문에 여전히 고통을 겪고 있는 이도 많다. 그러나 한편에선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그의 방문이 달갑지 않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김정은의 방문이 국론 분열의 단초가 될 정도로 우리 사회가 허약하지 않다는 자신감이다. “공산당이 좋아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가 한국 드라마를 몰래 보다 들키면 수용소까지 끌려가는 체제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고 그 사실만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16년 전 다대포에서 움츠리고 불안해 했던 건 남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만경봉호를 타고 온 그들이었다.

논설위원 flute @kookje.co.kr